성은 마씨(馬氏), 호는 벽초(碧超), 경선은 법명. 충청남도 청양 출생. 아버지는 정식(正植)이다.
1908년 탁발 나온 만공(滿空)의 감화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수덕사(修德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그 뒤 만공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지리산 등의 명산을 다니면서 수도하였다.
수도할 때는 언제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화두(話頭)로 삼고 의심하였는데, 만공이 너무 덩굴이 많다고 하면서 ‘한 생각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화두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그 뒤 만공의 법맥을 이었고, 1940년부터 1970년까지 수덕사 주지를 지냈다.
이 때 수행자들의 공부를 돌보기 위해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고, 수덕사에서 선원인 정혜사(定慧寺)까지 1,200 돌계단을 쌓았으며, 대웅전 하나만 있던 수덕사를 중창하여 오늘날의 대사찰로 만들었다.
6·25전쟁 때는 비구니 일엽(一葉) 등과 함께 절을 지키기 위해서 남아 있었는데, 공산주의로 전향하라는 협박을 받고 “나더러 남의 것 빼앗아 먹는 도둑놈 되라는 말이냐.”고 호통을 쳐서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1985년 덕숭총림(德崇叢林)의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다시 조계종단의 추대로 방장이 되었으나 추대식에서도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마다하였다.
평생 동안 법문을 하기 위해서 법상(法床)에 오르지 않았으며, 1배 이상의 절을 사양하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였다. 잠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 하였으며, 행동하는 대로 따라서 배우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 하여 따로 말로써 가르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알 것’을 강조하였다.
1986년 5월 2일 제자에게 일력을 가져오게 하여 2일부터 6일까지 다섯 장을 떼어내고 “이제 갈란다.”라는 말을 한 뒤 5월 6일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수덕사에서 입적하였으며, 5월 10일 다비식을 가졌다. 평생 교우가 깊었던 승려로는 혜암(惠庵)과 일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