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성은 박씨(朴氏), 호는 고봉(古峰). 경욱은 법명이다. 대구의 목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고, 18세에 혼인하였으나 19세에 방랑길에 올랐다. 방랑 도중 일하(一河)의 인도를 받아 통도사로 가서 1911년혜봉(慧峰)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상주 남장사(南長寺)로 옮겨 은사에게서 사미계(沙彌戒)와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전라도 석금산으로 옮겨서 정진하였다.
1915년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의 성전선원(聖殿禪院)에서 좌선하던 중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여러 선지식을 찾아 정진하다가 1922년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의 만공(滿空)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고 고봉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 뒤 정혜사에서 여러 해를 지내다 40세가 되던 해에 거사(居士) 차림으로 방랑길에 올랐다가, 대구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또한, 상해(上海)에 있는 독립군을 돕다가 1년 동안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서봉사(棲鳳寺)·백운사(白雲寺) 등의 조실(祖室)이 되어 많은 수행자들에게 선법을 가르쳤고, 6·25 전쟁 때 공주 마곡사(麻谷寺) 은적암(隱寂庵)에서 선회(禪會)를 열고 선지(禪旨)를 강하였으며, 말년에는 아산 봉곡사(鳳谷寺), 대전 미타사(彌陀寺) 등지에 머물렀다. 특히, 그는 파격적인 기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양산 내원사(內院寺)에 있을 때 주지 혜월(慧月)이 직접 밭갈이 등의 일을 하여 승려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게 되자, 혜월이 출타한 틈을 타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소를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양식과 옷감 등을 마련해 왔다. 혜월이 돌아와 소를 찾자 방 안에서 옷을 활짝 벗고 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항상 술과 벗하며 살았으나 언제나 청정한 마음을 잃지 않았고, 술좌석에서도 결코 화두(話頭)를 잃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법을 묻는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남의 집 부처를 건드리지 말고 자성 속에서 법을 구하도록 깨우쳤다. 70세에 서울 화계사(華溪寺)로 옮겨 머무르다가 1961년에 입적하였으며, 다비(茶毘) 뒤 빨강·노랑·파랑 빛깔의 사리를 남겨 부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