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전은 자연산 미역이 생산되는 미역밭이다. 미역은 일찍부터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건강보조식품 및 구황식품으로 지목되어 왔으며, 동해안은 4~5월경, 남서해안은 6~7월경에 주로 채취한다. 따라서 미역의 생산 터전인 곽전에 대한 관리 및 소유에 대해 역사상 많은 논의가 제기되었다. 조선시대 곽전에 대한 지역별 소유 관련 논의와 곽세 문제, 그리고 해방 이후 「수산법」의 정비 과정에서 법제사적 관습법적 논의를 배제한 채 이루어진 공동소유 규정으로 인해 발생한 동해안 어촌 사회의 곽전 분쟁 등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미역은 식품적 가치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바다 해초의 하나이다. 주로 우리나라의 동해 연안과 남해 · 서해의 도서지방에서 생산된다. 미역은 수중의 암초 또는 수면과 연접하여 수중으로 이어진 바위에 포자가 부착되어 생장하는 갈조류 해초로서 전근대 사회에서부터 그 유용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산모의 건강 회복을 위한 건강보조식품으로서의 중요성과 함께 기근을 구제하는 구휼 식품 및 일상적 식료품으로서의 효용성 등으로 인하여 그 가치를 특별하게 인정받아 온 대표적 해조류가 된다. 이러한 바닷속 미역의 생산 터전을 곽전(藿田)이라 한다.
곽전은 바다 가운데 존재하는 미역의 생산 터전인 암석을 말한다. 그래서 곽전을 달리 곽암(藿巖) 또는 곽반(藿磻)이라고도 한다. 농업생산에 있어 육지의 전답(田畓)에 비견하여 바다에 있는 미역의 생산 터전을 곽전 즉, 미역밭으로 지칭한다. 전답과 같이 구획을 설정할 수 있고 시기에 맞는 제초 작업 등의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며 산물이 주는 높은 유용성으로 인하여 바다 산물 중 유독 미역의 생산 터전에 대해서만 곽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곽(藿)은 미역을 말한다. 해대(海帶)를 곽이라 하고 방언으로는 마욕(麻欲)이라 하는 바[『경세유표(經世遺表)』 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 곽세조(藿稅條)], 그 마욕이 오늘날 미역으로 통용되고 있다. 미역의 생산 터전인 곽전은 역사상 고려조에 이미 국가의 중요 생산요소로 관리되었다. 즉, 염분(鹽盆)의 좌수와 어량(魚梁) 망소(網所) 곽전의 결부(結卜) 등이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 가운데 왕자의 혼인 등의 경우에 이를 절수(折受)하기도 하였으며 고려 중기 이래로는 이들 산천해택(山川海澤)의 이익들이 권세가에 귀속되고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다[『세종실록』, 세종 29년 9월 임자(壬子)]. 조선 왕조에 들어서는 산장수량(山場水梁) 등의 자연 자원은 일국인민(一國人民)이 함께 관리 수익하는 공공재산임을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권문세가들의 전단적 이익 횡점에 대해 공의(公義)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태조실록』, 태조 6년 5월 정미(丁未)].
특별히 바다의 산물 중 미역은 오직 동방의 우리나라 연안에서만 생산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당시 제주에서는 상선을 이용한 미역 거래로 부자가 되는 사례도 나타난다[『세종실록』, 세종 29년 9월 임자]. 미역은 산모에게 중요한 건강보조식품이며 일상에서는 구휼 식품으로서의 유용성 때문에 궁궐과 관청에서는 진상(進上) 및 공상(供上)의 필수품목으로 정하여 상시 비축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정조 연간의 『자휼전칙(字恤典則)』에서도 산모와 유모에게 쌀과 함께 미역을 반드시 지급하도록 하고 있으며 또한 생계가 곤궁하여 진휼소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미역과 장을 보내어 죽을 끓여서 기아를 면하게 하고 있다[『영조실록』, 영조 9년 2월 무진(戊辰)].
영조 대에 시행된 균역법(均役法)은 바다의 주요 산물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어염과 선박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대표적 해초인 미역에 대해서도 곽세(藿稅)라는 별도 세목으로 세금을 부과한다.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으로서의 중요 가치로 인해 궁가 및 세가들은 곽전을 경쟁적으로 소유하려 하였으며 이 과정에 어촌민이 갖던 곽전으로부터의 이익은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수중으로 옮겨가게 된다. 더하여 미역에 부과하는 곽세로 인해 생산 어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된다. 균역법의 시행 전에는 어염과 곽전으로 인한 소득으로 관내의 어촌 가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지금은 바다에서 나오는 이익을 모두 빼앗김으로 인해 생계가 곤란함을 호소하고 있다[『정조실록』, 정조 3년 3월 계묘(癸卯)].
곽전은 조선시대에 이미 지역별로 그 관리 및 소유 형태를 다양하게 하고 있다. 『경세유표』 균역사목추의 곽세조에 의하면 호남 지역 곽전의 경우 개인이 소유하여 지름이 10여 보에 불과한 미역바위가 사가(私家)에서 이삼백 냥에 매매되고 있다. 지역에 따른 곽전의 관리 및 소유 형태를 살펴보면, 호남 · 영남 소재의 곽전은 거의 토호(土豪)들이 독점하고 있어서 공물(公物)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동 지방의 통천(通川) 이남과 삼척(三陟) 이북 지역에는 본래 사주(私主)가 없고 관에서 관리하는 일도 없었던 것이기에 지금은 연해 각 진(津)의 담당 관리로 하여금 민인들과 함께 공동으로 관리하고 채취해서 세액을 내고 각자 몫을 분배토록 하고 있다.
또한 삼척 이남인 울진과 평해 지역은 일찍이 관수(管守)가 있어서 곽전을 담당하는 밭지기[田直]나 감고(監考)를 두고서 생산된 미역에 대해 곽세를 징수해 갔으나 지금은 곽전마다 세액을 책정하여 곽세를 과다하게 징수해 감으로써 어려움이 지적된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어염선세 등과 함께 미역에 대한 곽세의 징수는 많은 해조류 중에 유독 미역이 갖는 사회경제적 중요성에 기초한 조세정책의 결과가 된다.
한편, 곽전에 대한 소유관계는 조세 수취와는 다르게 당해 지역사회의 여러 요인과 결합하면서 사적소유와 국공유 등으로 다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가는 강토 내의 산물 및 생산요소들에 대해 조세 수취를 중요 목표로 설정하는 가운데 그 소유관계에 대해서는 지역사회가 운용하는 관행 및 관습에 의존하는 양태를 보이고 있다. 미역과 그의 생산 터전인 곽전은 바로 바다라는 특정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객체로서 그 소유관계에 대한 일률적 규율에 어려움이 존재한다. 따라서 영남과 호남 지역의 곽전은 조선 후기에 이미 사유화가 정착되면서 매매와 상속이 일반화되고 있다.
영남 지역 동해안의 곽전 상황은 「경상도내연강해읍정축조각양장표수환성책(慶尙道內沿江海邑丁丑條各樣掌標收還成冊)」[1878]에서 상세히 적고 있다. 영남 지역 동해안에서 가장 많은 곽전을 보유하는 지역은 장기현(長鬐縣)의 109개소로서, 영남 지역의 영해 · 영덕 · 청하 · 흥해 · 영일 · 경주 · 울산 · 기장 · 동래 등의 곽전 143개소에 버금가는 다수 곽전을 보유하고 있다. 즉, 이들 지역의 곽전이 사적 소유물로서 매매와 상속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의 고문서 자료와 매매 관행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 영남 동해안의 곽전 매매 문서는 일부 지역에서 1970년대까지 나타난다.
또한, 곽전의 소유관계를 이해할 하나의 자료로 대한제국기의 「조세징수규칙시행세칙(租稅徵收規則施行細則)」[1906년 10월 30일 탁지부령(度支部令) 제22호]을 보면, 어장 선박 등에 대해서는 매매양여(賣買讓與)와 관련하여 ‘소유자(所有者)’라는 용어를, 곽전의 매매양여 등과 관련하여서는 ‘지주(持主)’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곽전의 특수성에 기한 소유관계를 지주라는 용어로 구분하여 표현하는 것이 된다.
영남 지방 동해안 어촌 사회는 1960년대 중반부터 곽전에 대한 소유권 분쟁을 겪게 된다. 1953년 9월에 제정된 「수산업법」은 1963년 4월에 있은 제3차 개정에서 제1종 공동 어업에 대해 규정한다. “일정한 수면을 전용하여 패류 · 해조류 또는 도지사가 정하는 정착성 수산물을 채포하는 어업”을 규정하면서 품목에 대한 구분이 없이 이를 어촌민의 협업적 공동소유 관계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영남 동해안 지역은 조선 후기 이래 곽전에 대한 사적소유 관계가 지속적으로 실행되어 온 지역이다.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한 관습으로 지지를 받으면서 사적 소유권을 보장받아 온 대표적 산물인 미역의 생산처인 곽전에 대해 동요가 일게 되었다. 제1종 공동 어업구역에 존재하는 곽전에 대해 역사적 경과와 실체에 기한 특수성을 전혀 조사 반영하지 못한 입법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분쟁이 격화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을 지속한 동해안 어촌 사회의 곽전 분쟁은 곽전주(藿田主)와 비곽전주(非藿田主)[비곽주]로 진영을 나누어서 극렬하게 진행되었다. 상대방을 향한 폭언, 폭행과 법정 분쟁의 지속은 어촌 사회의 협업 공동체를 완전히 해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미역은 생산을 위해 때를 맞춘 미역바위 제초 작업이 선행된다. 이를 기세(磯洗) 작업이라 한다. 영남 동해안은 농가의 추수를 마치는 가을철을 적기로 하여 집중된 노동력을 투입한다. 어촌 사회의 협동심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역 채취 생산은 겨울을 지나고 봄철 4~5월경에 이루어진다. 농사와 같이 때를 맞추어 기세 작업을 해야 하는 시기에 어촌민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벌인 반목과 폭력적 행위의 결과는 생산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로 요약되는 한국의 사회 변화는 촌락 사회를 떠나는 이촌 인구의 급증을 가져온다. 어촌 사회의 분쟁을 보면서 이촌 인구는 더욱 증가하고 이어서 미역 생산은 급감한다. 아울러 1970년경부터 시작된 양식 미역 기술의 발달과 보급은 자연산 미역의 생산처인 곽전에 대한 관심을 줄였다. 그러나 곽전에서 생산되는 자연산 미역에 대한 가치와 효용은 양식을 통한 미역과는 큰 차이를 갖는다. 바다의 수중 바위인 곽전에 포자로 자연번식 · 생장하는 자연산 미역, 그 생산 터전인 곽전의 관리 및 소유관계를 합당하게 정립하면서 역사를 이어 가치를 존중받아 오는 자연산 미역의 생산 증대 방안을 새롭게 모색할 것을 오늘날의 과제로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