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은 대표적인 식용 해조류의 하나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특히 즐겨 먹는다. 오늘날에는 미역의 인공양식법이 개발되어 갈색혁명이라고 할 만큼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으나, 과거의 자연산 미역은 그 착생지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양산하기가 어려웠다.
미역 채취장이 제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산되었던 것이므로 곽전은 토지나 다름없이 그 경제적 가치가 컸다.
고려시대에는 곽전이 왕자에게 하사되기도 했다는 사실이 ≪세종실록≫ 29년조의 예조참의 이선제(李先齊)의 상서에 보인다. 어량(魚梁)·염분(鹽盆) 등과 함께 곽전이 왕자에게 하사되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미역이 식품으로서의 가치가 컸고, 따라서 곽전의 경제적 가치도 컸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제(田制)의 문란으로 토지 사점(私占)이 성행할 때 어장과 곽전도 사점대상이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에 “곽전·태전(苔田)을 모두 토호가 사점하였는데 그 유래가 깊다.”라고 하였다. 태전은 자연산 김의 채취장을 말한다. 곽전과 태전은 조선시대에도 그 가치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약용의 ≪경세유표≫에는 호남의 곽전에 대하여 “호남 곽전의 세금 액수는 사목(事目)을 보지 않아 지금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둘레가 1백여 보에 불과한 한 개의 섬에 대하여 사가(私家)에서 수세(收稅)하기를 혹 2백∼3백 냥을 징수하며, 지경이 10여 무에 불과한 한 주먹의 돌을 사가에서 매매하기를 혹 2백∼3백 냥의 값으로 한다.”는 대목이 있다.
곽전이 있는 작은 섬을 민간인이 독점하여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미역이 착생하는 바위, 즉 곽암(藿巖)은 작은 것도 비싼 값으로 매매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역은 곽암에서 자라므로 곽암이 있는 곳이 곽전이 된다. 곽암은 과거 국유인 공암(公巖)과 사유인 사암(私巖)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08년 11월에 공포되어 다음해 4월부터 시행된 <어업법>에 의하여 곽전은 제2종 면허어업, 즉 일정한 구역 내에서 포패채조(捕貝採藻) 또는 양식을 하는 어업의 어장에 편입되었다.
오늘날에는 미역 채취업이 <수산업법>의 규정에 의하여 제1종 공동어업에 속해 있으므로 곽전은 모두 제1종 공동어업 어장에 속하며, 어촌계(漁村契)가 이를 공동으로 관리,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