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의 능인 현릉(玄陵)의 원찰로도 유명하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원래 시흥종(始興宗)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광암사(光巖寺) 또는 운암사(雲巖寺)로 불리었다.
공민왕 때 시흥종과 조계종(曹溪宗) 사이에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일어나자 공민왕은 조계종의 천화사(天和寺)를 시흥종에 예속시키고, 시흥종이었던 이 절을 조계종에 예속시킨 다음 ‘광통보제선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1372년(공민왕 21) 왕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여 1377년(우왕 3) 준공하였는데, 공사의 감독은 척산군(陟山君) 박원경(朴元鏡)과 밀양군(密陽君) 박성량(朴成亮)이 맡았다.
당시의 당우로는 미륵전·관음전·해장당(海藏堂)·선실(禪室)·승요(僧寮)·선실(膳室)·객실·종고루(鐘鼓樓)·창고·욕실 등 100여 동이 있었다.
그리고 단청은 물론 범패(梵唄)에 필요한 악기와 연등에 사용될 도구 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1374년 현릉을 이곳에 모신 뒤부터 공민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고, 1378년 이색(李穡)이 지은 광통보제선사비명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