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화 ()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회화
개념
야외에서 개최되는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대형 불화. 괘불 · 괘불탱.
이칭
이칭
괘불, 괘불탱
정의
야외에서 개최되는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대형 불화. 괘불 · 괘불탱.
개설

사찰의 전각 내부에 봉안하는 불화와 달리 전각 외부에 걸리는 대형 불화이다. 의식의 규모가 커 전각 내부에 수용할 수 없거나 야외에서 개최해야 할 성격을 지닌 불교 의식은 주전각 앞 중정(中庭)에서 개최되었다. 괘불화는 작은 경우에는 세로 4∼5m 정도의 화폭에 그려진 예도 있으나 대부분 10m가 넘는 대형 화폭에 조성되었다. 괘불화라는 명칭은 화기(畵記)에 기록된 괘불(掛佛)‧괘불탱(掛佛幀)이란 용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의식에 앞서 ‘불화를 건다’는 의미의 용례[掛-佛幀]가 의식용 불화의 명칭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괘불화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예는 1622년에 조성된 죽림사세존괘불탱(보물, 1998년 지정)이며,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괘불화 100여 점이 조사되었다.

연원 및 변천

한국에서 괘불화가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작품과 기록을 통해 볼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대규모 천도 의식(薦度儀式)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괘불은 야외 의식을 위한 전용 불화가 필요했던 조선 후기 불교신앙의 특징을 보여준다.

괘불화는 평소에는 함에 넣어 전각 내부에 보관하다가 의식이 있는 날 아침 중정(中庭)으로 옮겨와 사용한다. 법당에서 불화를 옮겨 와 펼치는 절차를 괘불이운(掛佛移運)이라고 한다. 괘불을 이운할 때 의식 동참자들이 암송하는 진언(眞言)과 게송(偈頌)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영취산(靈鷲山)으로부터 내려와 법(法)을 설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양을 받은 불보살과 천도받을 영혼을 불러 모아 부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는 의식에는 불교 음악과 무용, 공양, 시식(施食)의 전 절차가 한데 어우러진다.

내용

괘불화는 불보살에 대한 공양 의식인 상단권공(上壇勸供)에서 출발해 점차 이상적인 천도의식으로 체계화된 영산회(靈山會, 靈山齋)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성 당시 화기에도 ‘영산괘불’, ‘영산회 괘불’로 기입된 예가 많다. 영산회는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던 인도 기사굴산에서의 설법 모임으로, 영산괘불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의식용 불화라는 의미와 영산회 의식에 걸리는 괘불화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영산회는 조선시대 불보살에 대한 권공 의식으로, 여러 종류의 재에 앞서 행하는 재전작법(齋前作法)이었다. 의식의 목적이 살아있는 존재와 세상을 떠난 자의 화해이든, 오랜 가뭄 끝에 비를 비는 기우재(祈雨齋)이든, 죽어서 갚아야 할 생전의 업을 미리 갚는 예수재(豫修齋)이든 본격적인 의식은 영산작법으로 불보살에게 권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괘불화를 헌괘한 의식의 종류는 사십구재(四十九齋), 예수재, 수륙재(水陸齋)와 같은 천도 의식이나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 성도재(成道齋), 불사(佛事)를 마친 후의 낙성식(落成式)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의식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도상의 괘불화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괘불화 한 점을 조성하는 데 많은 인원의 모연(募緣)이 필요한 점, 한 점의 괘불화를 계속 보수하여 사용한 기록 등을 볼 때 한 사찰에서 여러 도상의 의식용 불화를 갖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 여러 다양한 의식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는 의식의 주존으로 석가모니불이 가장 선호되었다.

괘불화의 도상 중에서도 영취산의 석가모니불을 도해한 비중이 가장 높다. 특히 영산교주 석가모니불과 석가의 설법이 묘법임을 증명한 다보불[證聽妙法多寶如來], 극락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아미타불[極樂導師阿彌陀佛]의 세 여래와 문수․보현보살, 관음․세지보살을 배치한 형식은 조선 후기 뛰어난 불화승인 의겸(義謙)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용된 이후 괘불화의 대표적인 도상으로 널리 제작되었다. 이외에도 삼신불(三身佛)이나 삼세불(三世佛), 혹은 삼신불과 삼세불이 융합된 도상도 제작되었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신체를 장엄한 존상이 주존으로 등장하는 장엄신 괘불(莊嚴身掛佛)은 일반 불화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의식용 불화의 독특한 도상으로, 진리를 깨달은 직후 설법하는 보신불(報身佛)의 형태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는 두 가지 유형으로 제작되었다.

의의와 평가

17세기에 조성된 괘불화는 전각 안의 불화를 대형 화폭에 확장시킨 형식이었다. 점차 수미단(須彌壇)에 앉아 설법하는 모습보다 의식 도량에 강림한 듯한 입상(立像) 형식이 선호되었다. 주전각 내부에 걸리는 불화에서 권속을 생략하고 구성을 단순화했으며 의식의 주존만을 그린 불화도 유행하였다. 야외에 걸리기에 바람으로부터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대형의 화폭에 이상적인 의식의 주존을 도해하는 것은 괘불화를 조성하는 화승(畵僧)들에게 맡겨진 큰 과업이었다.

17세기에는 영산회, 삼신불, 장엄신, 오불회(五佛會) 등 괘불화의 전 도상이 다 등장하나, 점차 영취산의 석가모니불에 기초한 도상이 다양한 의식의 교주를 통합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선호되었다. 무수한 시공간(時空間)의 불세계(佛世界)에 대한 관념과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불신관(佛身觀)에서 석가모니불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괘불화는 법화신앙에 기반하면서 선종(禪宗)과 화엄(華嚴), 미륵(彌勒) 신앙 등 당시의 사찰, 승려, 신도가 지녔던 다양한 신앙적인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의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독특한 도상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괘불화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미 』16-조선불화-(문명대 감수, 중앙일보사, 1984)
「조선조 석가불화의 연구-법화경미술연구-」(문명대, 『조선조불화의 연구』-삼불회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괘불』(윤열수, 대원사, 1990)
「조선 후기 괘불탱의 도상연구」(정명희, 『미술사학연구』233․ 234, 한국미술사학회, 2004)
「삼신불의 도상 특징과 조선시대 삼신불회도의 연구-보관불연구Ⅰ」(문명대, 『한국의 불화』12권(선암사본말사편), 성보문화재연구원, 1998)
「조선조 괘불의 고찰-본존 명칭을 중심으로」(장충식, 『한국의 불화』직지사본말사편(下), 성보문화재연구소, 1995)
「조선조 괘불의 양식적 특징」(장충식, 『사학논총:지촌김갑주교수화갑기념』, 지촌김갑주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94)
집필자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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