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韓允)·민상제(閔賞濟) 등과 함께 신라 말과 고려 초 구양순풍 해서의 대가로 평가된다.
940년(태조 23)에 건립된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943년 건립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의 글씨를 썼다.
이 두 비 외에는 그의 행적이나 가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나 작품이 없는 실정이다.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에는 ‘興文監卿仇足達書(흥문감경구족달서)’라고 쓰여 있고,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에는 ‘沙粲具足達書(사찬구족달서)’라고 쓰여 있어서 두 비를 제작했던 당시 구족달의 관직명을 알 수 있다.
후자에서는 그의 성이 ‘구(仇)’에서 ‘구(具)’로 바뀌긴 하였지만, 이 두 기록이 동일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통설이다. 비문은 모두 최언위(崔彦撝)가 지었고, 비문의 서체는 해서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여 고려시대에도 애호되었던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가 구양순(歐陽詢)의 글씨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자획의 처리가 매우 예리하고 강경하여 강한 필력을 시사하고 있고 여유있는 공간분할의 묘에서 그의 개성이 역력히 드러난다. 필세가 뛰어나고 장대하여 북조의 의(意)가 있다는 『서청(書鯖)』의 평, 강경하고 굳으며 예리하다는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의 평에 부합되는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