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21일 정무묵(鄭武默)이 『민보(民報)』의 판권과 지령(紙齡)을 계승하여 서울 중구 소공동에서 창간하였다.
1948년 8월 16일부터 편집인 겸 발행인 이봉구(李鳳求), 주필 송지영(宋志英), 편집국장 정국은(鄭國殷)으로 개편하였다.
판형은 블랭킷판 2면, 15단으로 시작하였으며, 광복 후 다른 신문에 앞서서 신문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정계의 뒷소식을 취재하여 보도하고, 재치 있는 시사평론으로 독자가 흥미를 가지도록 기사의 취재와 편집방향을 설정하여, 상업신문으로서의 성격을 원활하게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발행되는 『조선일보』·『동아일보』·『한성일보』·『경향신문』 등과 함께 5대일간지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 신문의 논조는 언론의 공정성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정부의 정책에 극히 비판적이었고, 공산계열을 비호, 찬동하는 편파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1949년 3월 4일 「경북폭동사건(慶北暴動事件)에 경북지사 가담」이라는 기사가 원인이 되어, “공산계열의 발호를 조장하고 파괴분자를 비호하여 대한민국의 치안을 방해하고 민심을 혼란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안녕질서를 위협하였다.”는 이유로 사회부장 김현제(金顯濟), 기자 최기덕(崔起德) 등이 구속되고, 1949년 3월 6일 폐간처분을 당하였다. 그 뒤 보름 뒤인 3월 17일『국도신문(國都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어 다시 발간하였다. →국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