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9월 1일 부산에서 김형두(金炯斗)가 주체가 되어 『동아산업신보(東亞産業新報)』와 주간 『수산신문(水産新聞)』을 통합하여 『산업신문(産業新聞)』으로 출발하였다.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되었으며, 사옥은 당시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 두었다. 1950년 8월 19일에는 제호를 『국제신보(國際新報)』로 바꾸었고, 1977년 6월 1일에는 다시 『국제신문』으로 바꾸었다.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를 사시(社是)로 하고 국시선양·언론창달·문화향상을 편집방침으로 하였다. 1948년 1월부터는 부산에서 최초로 갱지(更紙)를 사용하고 대판(大版)으로 발행하였으나 곧 경영난에 부닥쳤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자 신문은 AP·AFP·로이터(Reuters) 등 통신사와 특약을 맺고 세계의 뉴스를 독점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서울의 중앙지를 압도하여 8·15광복 이후 최고 10만 내외의 발행부수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에 관련된 국제정치의 정세변화에 대한 시사해설란은 큰 인기를 모았다. 1951년 6월 사세확장에 따라 사옥을 남포동으로 이전하였다.
1953년 4월 1일에는 『세계통신(世界通信)』을 설치, 운영하였다. 1953년 7월에는 중앙지로서의 승격을 위하여, 조선일보사 내에 임시사무소를 준비하고 서울 발행의 판권을 신청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았다.
1958년 9월 25일 우리나라 지방지로서는 최초로 조석간제를 채택하고, 이어 1959년 1월부터는 조석간 8면을 발행하였다. 1959년 7월 8일에는 사옥을 다시 대교로(大橋路)로 이전하였다.
1960년 3월에는 부정선거 반대시위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폭행, 연금당하기도 했으며, 1961년 7월에는 주필 겸 편집국장 이병주(李炳注)와 논설위원 2명이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61년 4월, 운영자금의 부족으로 3일간 휴간하는 등 경영난을 겪다가, 1964년 5월구인회(具仁會)가 인수하면서 다시 대대적인 확장을 꾀하였다.
그 뒤 전송사진수신기·팩시밀리수신기·다색도초고속윤전기·사진제판시설 등 시설과 기재의 보완을 위하여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78년 5월 7일에는 자매지로 『주간국제(週刊國際)』를 창간, 전국 판매망으로 발행부수 30만 부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 신문이 주관한 주요 행사로는 국제원호대상, 국제어린이문학·미술상, 화랑대기쟁탈전국고교야구대회·전국우수중고교축구대회 등이 있었다.
1980년 11월 30일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에 따라 『부산일보 釜山日報』에 통합되어 지령 1만 992호로 종간되었다. 1989년 2월 1일 다시 복간되었으며, 1997년부터 조간으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