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상류층 가정에서 돌 무렵부터 4, 5세 정도의 어린이들에게 호사 겸 방한모로 씌웠다. 주로 비단으로 만들었으나, 여름에는 사(紗)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형태는 정수리를 덮은 모부(帽部)가 세 가닥 또는 그 이상의 여러 가닥으로 얽어져 있고, 그 밑으로 여러 가닥의 드림(댕기)이 드리워져 있다.
여러 가닥 굴레를 머리에 쓰면 앞 얼굴만 나오고 가닥끼리는 서로 겹쳐져 머리가 보이지 않으나, 세 가닥 굴레는 일부는 가리어지나 그 밖에는 노출되어 방한보다는 장식용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가닥 굴레는 주로 북쪽 지방에서, 세 가닥 굴레는 서울지방에서 사용하였으며 지방에 따라 그 모양이 달랐는데, 전라도가 가장 화려하고, 개성 지방은 정교하며, 서울 지방은 얌전한 꾸밈을 하고 있다.
사용된 옷감과 색을 보면 여러 가닥 굴레는 겉감을 비단으로, 안감은 비단이나 융으로 하며, 색은 흑·적·자(紫)·남(藍)·연두·분홍 등 가닥마다 서로 다르게 배합하였다. 세 가닥 굴레는 겉감·안감 모두 비단류나 사류로 되어 있고 색은 남·흑·연두·적색 등을 쓰고 있으며, 모부의 가운데에 길상문(吉祥紋)을 수놓거나 금박으로 장식하였다.
어린이용이었지만 부모 생존시 딸이 회갑을 맞을 때, 딸은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굴레를 쓰고 어머니 무릎에 안겨보는 풍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