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폐사지(廢寺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할 뿐, 그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금동보살입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보살상의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현재의 상태는 대좌(臺座)와 보관(寶冠)이 없고, 왼손이 팔뚝에서부터 떨어져 나갔다. 도금의 흔적은 약간만 남아 있을 뿐이고 동질(銅質)의 바탕이 드러나 적갈색을 띠고 있다.
보살상은 몸에 비하여 머리는 약간 큰 편이고, 머리 윗부분에는 보계(寶髻)만이 남아 있다. 얼굴은 눈을 경계로 그 위쪽보다 아래쪽이 유난히 길어,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다. 코는 길고 뾰족하며 귀도 길고 직선적이다.
상체는 나신이고, 두 가닥의 주름진 천의가 왼쪽 어깨에서 앞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허리에서 뒤쪽 등으로 돌아 각각 양팔 위로 흘러내리고, 오른손이 그 중의 한 자락을 잡고 있다. 팔뚝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고 있다.
군의(裙衣)의 일부는 허리에서 접혀져서 다리 윗부분에 한 번 드리워지고, 나머지는 발목 위에까지 내려져 있다. 주름은 U자형의 도드라진 양각선으로 표현되었고, 두 다리 사이에는 굴곡진 형상으로 늘어졌다. 군의 자락 속에서 도톰한 다리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불상의 뒤쪽에는 목에 희미한 천의와 허리에 접혀진 군의의 윤곽이 보인다. 주조 과정에서 생긴 긴 타원형의 구멍이 머리와 몸의 상부와 하부에 각각 하나씩 뚫려 있다. 몸통 아래와 위에는 꼭지가 하나씩 있어, 광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비교적 균형이 잘 맞고 몸의 형태도 유연한 편이다. 하지만 주조 기법이나 조형상으로는 약간 딱딱한 느낌을 풍긴다. 이런 양식의 보살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719년으로 추정되는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1962년 지정)이나 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1963년 지정)의 보살상과 재료는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이다.
이러한 보살상 형식은 중국의 당나라 조각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8세기 초기의 보살불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식이 나타난다. 이 금동보살상의 얼굴이나 몸체의 표현에서 보이는 약간의 경직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