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년에 신라군 비장이었던 견훤이 지휘 아래 병력을 이끌고 독립하였다. 그의 거점은 승평(昇平)으로 불렀던 지금의 순천만이었다. 이곳에서 해적을 퇴치하고 신라의 대외무역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면서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에 반해 나주의 회진은 여러 해상 세력의 이해가 얽혀 있었고, 나주 앞바다의 압해도에는 능창(能昌)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견훤이 명줄과 같은 나주 회진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나주 세력은 해상 제해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나주 세력의 불만이 고조되기 마련이었다. 결국 기회를 노리던 나주 세력은 901년 8월에 견훤이 멀리 대야성으로 원정한 틈을 타고 후백제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습격해서 죽인 후 회진항을 직접 장악한 것 같다.
이에 대한 견훤의 응징을 ‘노략〔掠〕’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상당히 거친 방법을 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나주 지역의 민심이 궁예에게 붙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 말에 견훤이 후백제 왕을 일컬으며 이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군(郡: 羅州郡) 사람이 후고구려 왕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궁예는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하여 해군을 거느리고 가서 이 지역을 빼앗아 나주로 만들었다.(『고려사』 권57, 나주목)”라고 하였다.
후백제와 대립각을 세운 나주 세력이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세력은 궁예였다. 궁예가 나주 점령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후백제의 후방을 공략하여 전방에 대한 움직임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둘째 후백제 대외 교역의 위축과 외교적 고립의 유도였다. 실제 왕건은 909년에 염해현(영광)에서 후백제가 오월국에 보내는 선박을 나포하였다.
이로 인해 후백제의 대외 교류는 꼬이기는 하였지만 국제항은 전주 임피와 희안, 그리고 승평항 등이 남아 있었다. 왕건은 909년에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렀을 때에는 견훤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들을 늘여 놓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를 서로 물고 수륙 종횡으로 군사 형세가 심히 성하였다.(『고려사』)”라고 하였다. 여기서 목포는 지금의 나주 영산포이고, 덕진포는 영암 덕진면 일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왕건의 군대는 후백제로부터 육로와 수로로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왕건은 바람의 흐름을 타서 불을 놓았다. 뜻밖의 화공에 후백제 선단은 속수무책으로 배의 열이 무너졌다. 후백제군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왕건은 후백제군 5백여 급을 베었고,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퇴각하였다.
왕건은 덕진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나주 지역을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덕진포보다 북쪽에 위치한 반남현 포구로 전선이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지금의 무안군 몽탄 나루 전설이나 파군천(破軍川) 지명을 본다면 덕진포 해전 이후에도 양국 간의 충돌은 여전하였다. 다만 전선은 덕진포 북쪽의 석해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이때 능창이라는 지역 해상 세력가를 포획하여 제해권 구축에 성공하였다.
910년에 견훤은 몸소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나주성을 공격하여 열흘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궁예가 증원군을 보내자 견훤은 포위를 풀고 퇴각하였다. 이후 궁예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다. 전쟁의 비중이 훨씬 커졌다는 증거였다.
즉 “건화 2년(912)에 견훤이 덕진포에서 궁예와 싸웠다.(『삼국사기』 견훤전)”라고 하였다. 「선각대사비문」과 「법경대사비문」을 통해 궁예의 서남해 친정이 확인되었다. 912년에 궁예가 직접 내려옴으로써 나주 경략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나주 일원은 929년부터 935년 초까지 6년 동안 후백제가 지배하였다. 후백제는 927년의 공산전투 이후 고려군을 격파할 무렵에 기세를 몰아 장악하였다. 반면 유금필은 935년 3월의 신검정변이라는 후백제 내분을 이용해 나주를 탈환한 것 같다.
나주 지역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나주는 후백제의 처음 수도였던 무진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백제에 늘 위협을 안겨줄 만한 곳이었다. 따라서 견훤은 정복 활동에 나서면서도 후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군이 나주에 집결하여 무진주 등을 공략한다면 반드시 구원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견훤은 국토의 후방에 다대한 병력을 배치하여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주 지역을 왕건이 장악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그리고 견훤의 고려 귀부(歸附)는 고려 영역인 나주를 경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