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년 정월에 견훤은 운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 고려 왕건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왕건이 운주를 점령하려는 것을 알게 된 견훤은 이에 대응하여 갑사(甲士) 5천 명을 선발하여 몸소 운주에 이르렀다. 운주의 통치 거점인 운주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산산성으로 지목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홍주성으로 지목된다. 홍주성의 하부 층위에서 신라 말의 유구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기병을 이용한 전투가 효율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 곳이 운주성일 가능성이 높은데, 현재의 홍주성 입지와 부합한다.
견훤의 군대가 운주성에 도착하였을 때 왕건의 군대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양편의 군사가 서로 싸우니 형세가 양편이 다 보전하지 못하겠소. 무지한 병졸이 살상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합시다.”라고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는 왕건 정권 출범 직후 후백제와 맹약을 맺은 그때의 삼국 분할 정립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당시 운주성은 후백제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고려군이 쳐들어 온 것은 국경 침범이었다. 그러니 후백제 영역 바깥으로 철수해 달라는 요구였다. 이때 견훤은 중무장을 한 정예군인 갑사를 거느리고 왔다. 그러자 왕건은 여러 장수를 모아 의논하였다. 왕건이 선뜻 결전에 나서지 못하자 유금필이 앞장섰다.
후백제군이 미쳐 진을 치지 못한 허점을 포착한 왕건의 막료 유금필이 경기(勁騎) 수천 명으로 돌격해 왔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군은 무려 3천 명이나 전사하였다. 그리고 후백제군 진영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훈겸(訓謙)과 용장(勇將) 상달(尙達) · 최필이 사로잡혔다. 최필은 상달과 더불어 ‘용장’이라고 하였다. 후백제군 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던 장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 고려사』 등에서 최필 등이 사로잡혔다는 기록과는 달리 『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필 등은 생포된 후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운주성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웅진 이북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웅진 이북’은 고려가 옛 백제 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