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구례 출신. 일명 김규열(金奎烈)·김규연(金圭然)·김유열(金遺烈)·김만규(金萬圭)·김만규(金晩圭)·해우(海友).
1919년 11월 대한청년단 명의로 된 격문을 고순흠에게 전라도 일대에 배부하게 했다. 1920년 1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3년 3월 개최된 전조선청년당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했으며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꼬르뷰로에서 여비를 지급받아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했다가 그 해 겨울 탈당하고 1927년 여름 용정(龍井)에서 재만조선공산주의자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대회에서 이동휘와 함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8년 8월 이동휘와 함께 코민테른 제6차대회에 방청인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대회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서울상해파 간부들과 조선공산당 지부승인 취소 이후의 운동방침에 관해 협의했다. 12월테제 발표 이후 결정서의 방침에 따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기도하면서 홍달수에게 공산주의 운동을 하도록 권고했다.
1929년 3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발기회에 참여했다. 6월 이 준비위원회의 중앙간부에 선임되어 연락부를 담당했다. 8월 당간부회 중앙간부의 결의로 고려공산청년회재건설준비회의 조직책이 되어 이 준비회 발기회를 조직했다.
1930년 7월 코민테른 극동부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고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었으나 코민테른으로부터 파벌적 성격을 갖는 이 준비위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주로 돌아와서 김영식을 통해 이 준비위 간부인 김일수에게 전달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