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 출생. 본관은 김녕(金寧). 아버지는 김영길(金永吉)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이다.
1897년부터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5년 출가하여 범어사 성해(性海)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범어사의 강원(講院)에서 공부하였으며, 1913년 범어사 명정학교(明正學校)에 입학하였고, 1918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이수하였다.
1919년 3월 7일 경환(敬煥)·상명(相明) 등 범어사의 청년 승려 50여명을 인솔하여 동래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동래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에 서울에서 전국 불교도의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한 뒤, 전국의 각 사찰과 연락하여 승려들을 동원하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4월신상완(申尙玩)·백성욱(白性郁) 등의 승려를 상해로 파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1919년 6월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불교계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범어사의 원로승려인 이담해(李湛海)·오성월(吳惺月)·김경산(金擎山) 등과 밀의한 뒤,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사찰재산 중에서 변출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하였으며, 1920년 2월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7월 도진호(都鎭鎬)와 함께 조선불교청년회를 발기한 뒤, 8월 김영우(金永祐)·성호(成浩) 등과 결사동맹을 맺고 왜성대(倭城臺) 폭파를 모의하였다. 1921년 3월 전국조선불교유신회를 창설하여 일제의 사찰령(寺刹令) 철폐운동을 벌였으며, 같은 해 다시 불교유신회(佛敎維新會)를 창설하여 친일승려들을 규탄하였다.
1928년 백성욱·김법린(金法麟)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1929년 1월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29년 8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불교청년대회에 조선불교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0년 7월 김법린·이용조(李龍祚) 등과 함께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10월 총본산 태고사(太古寺)의 건립을 결의, 추진하였으며, 1938년 만당사건으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당하였으나, 광복될 때까지 불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광복 후에도 불교계의 대표적인 위치에서 불교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으며, 1960년 2월 이강(李剛) 등과 함께 광복동지회(光復同志會)를 창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