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1909년 평양의 경흥야학교에 재학중 망국사태에 분개, 이재명(李在明)·박태은(朴泰殷) 등과 비밀회합을 가지고 매국적당들을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박태은의 집에서 모여 처단 대상을 협의한 결과 이재명은 지금의 망국사태는 이완용(李完用) 때문이라고 판단, 처단을 주장하였으나 이때 이용구(李容九) 처단이 급선무라 주장하였다. 결국 이완용은 이재명·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錄)이 맡기로 하고 조창호(趙昌鎬)와 함께 이용구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거사를 위하여 상경한 이들은 경호가 엄한 이완용을 먼저 처단한 뒤 곧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살피다 1909년 12월 이재명이 종현(鍾峴)천주교당에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저격하고 일본경찰에 붙잡혔는데, 거사계획이 탄로남으로써 이용구 처단 직전에 붙잡혔다. 1910년 4월 1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