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1년(문종 25) 민관시랑(民官侍郎)으로 표문(表文)을 가지고 송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로써 수십 년만에 송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100인의 사행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경유, 송나라에 갔다.
이때 수행한 박인량(朴寅亮) 등과 도중에서 화창한 시 70편으로 『서상잡영(西上雜詠)』 1권을 편찬했다. 1075년 예빈경 동지중추원사(禮賓卿同知中樞院事), 1077년 좌산기상시 지중추원사(左散騎常侍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 좌간의대부 안도(安燾)와 기거사인 진목(陳睦) 등이 오자 중추원사 형부상서(中樞院使刑部尙書)로서 이들을 안내하였다. 1079년 이부상서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吏部尙書參知政事兼太子少保), 1081년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