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나전 칠기는 백골장(白骨匠)과 칠장(漆匠), 나전장의 분업으로 제작되었다. 백골장이 만든 기물에 칠장이 옻칠을 한 후 나전장이 나전패를 문양대로 오려 칠 바탕에 붙이면 나전 칠기가 완성된다. 나전장은 나전 칠기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장(官匠)으로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왕실과 관(官)에 필요한 나전 칠기를 만들어 왔으며, 조선 후기에는 사장(私匠)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우리나라는 2000여 년의 칠기 문화를 이어 왔다. 옻칠을 사용한 흔적은 기원전부터 보이지만 칠기 표면 장식 기법의 하나인 나전 기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성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전장은 본래 관장으로서 고려시대 왕실 기물의 제작을 담당하던 중상서(中尙署)[공조서(供造署)]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중앙의 경공장(京工匠)에 소속되어 조선이 패망할 때까지 왕실과 관에 필요한 나전 칠기를 제작하였다. 또한 나전 칠기가 일반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부터는 통영(統營)을 비롯한 산지에서도 나전 칠기의 제작이 활발하였다.
나전은 조개껍데기의 진주층을 가공하여 공예 장식 재료로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자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빛깔이 영롱한 남해산 전복껍데기를 사용하였다. 본래 나전 칠기는 기물을 만드는 백골장과 칠장, 나전장의 분업으로 제작되는데, 나전장은 나전을 문양대로 자르고 오려서 옻칠 바탕 위에 부레풀이나 아교를 사용하여 붙인다. 나전 문양을 부착한 후에는 표면에 묽은 생칠(生漆)을 바르고 건조시켜 나전을 옻칠 바탕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나전 장식이 끝나면 문양과 칠면(漆面)이 수평이 되도록 옻칠을 반복해서 칠한 후 연마하고 광을 내어 마무리한다.
나전 기법은 칠기의 표면을 장식하는 다양한 기법 중 하나로 우리 민족이 가장 선호하던 공예 기법이다. 문헌 기록을 통해 이미 고려시대 왕실용 기물을 담당하던 중상서(공조서)에 칠장과 나전장이 관장으로 예속되어 있었으며, 중국에 보낼 나전경함(螺鈿經函)의 제작을 위해 임시기구인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하였던 사실도 확인된다. 특히 1124년에 쓰여진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 기록된 사실에서 고려시대 나전 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전장이 경공장으로 공조(工曹)에 2인, 상의원(尙衣院)에 1인이 배치되어 왕실에 필요한 나전 칠기를 제작하였다. 이 외에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되었던 경상남도 통영(統營)에서도 진상용 나전 칠기를 제작하였다. 반면 칠장은 외공장(外工匠)과 경공장에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이는 옻칠이 목가구 및 목공예품뿐만 아니라 선박 등 군수품에까지 널리 사용된 데 비해 나전은 왕실이나 상류층을 위한 사치품에 제한적으로 사용된 최상급 재료와 기법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나전장의 전통은 조선의 패망과 함께 단절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대한제국기 고종(高宗)이 전통 공예의 복원을 위해 황실 내에 설치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를 중심으로 그 맥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 나전 기법이 왜곡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해방 이후 전통 공예 기술의 복원 및 전승을 위해 나전장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나전 기법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민족의 대표적인 전통 공예 기술로 이를 제대로 복원하고 계승하여 후손에 전승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 무형유산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