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인경(仁卿), 호는 금헌(琴軒).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선산부사 남경(南憬)이다.
성종의 넷째딸 경순옹주(慶順翁主)를 맞아들여 의성위(宜城尉)에 봉해지고 성동(城東)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평소 한묵풍류(翰墨風流)를 즐겨 성종의 빈번한 행차가 있었는데, 마침 집안의 반송(盤松)이 무성하여 그 아래에 우물을 만들고 돌난간을 둘렀다. 이때 왕으로부터 사정(賜井)이라는 어필을 받아 새기고 ‘홍치계축(弘治癸丑)’ 넉자를 그 곁에 새겼다.
1504년(연산군 10) 평시서제조를 거친 뒤 1506년 왕명으로 미녀·준마·응견(鷹犬)을 뽑기 위하여 평안도에 파견되었고, 1508년(중종 3) 부친의 탐오(貪汚)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다. 1511년 신병을 이유로 족친(族親)과 하인들을 거느리고 황해도 배천에 내려갔을 때 각 고을에서의 작폐가 문제되어 대간으로부터 탄핵받았다.
이듬해에는 황해도관찰사에 의하여 치죄가 요청되었다. 1516년 방출궁녀(放出宮女)를 첩으로 삼은 것이 문제되어 작록(爵祿)이 삭탈되고 가까운 지역에 중도부처(中道付處)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1519년 훈련원첨정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