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誄)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짓는 제문(祭文)과 성격이 유사하면서 행적을 서술하는 전장(傳狀)의 내용이 담긴 한문 문체이다. 첫 부분에 서(序)를 써서 죽은 이의 세계와 행적을 기술한 뒤 4언체로 애도를 표현하는 체재로, 중국의 형식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와 사용되었으며 17세기 이후로 다양한 작가군이 등장하였다.
뇌는 처음에 죽은 이의 시호(諡號)를 짓기 위하여 그 자료로 짓던 것이었다. 뇌의 의미가 바로 ‘포개다[累]’가 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뇌는 『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 죽은 이의 일평생 덕행(德行)을 포개고 나열하여 칭송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천한 이는 귀한 사람의 뇌를 짓지 못하고 젊은이는 늙은이의 뇌를 지을 수 없다[賤不誄貴, 幼不誄長].”라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와서는 이러한 규정이 타파되어 오직 애도만을 표시하였다. 따라서 시호에 관해서나 귀천장유(貴賤長幼)에 대한 절차에 관해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뇌의 문장이 처음 문헌에 보인 예로는 『좌전(左傳)』 애공(哀公) 16년 조와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등재된 노 애공(魯哀公)이 공자의 죽음을 애도한 「공자뇌(孔子誄)」와, 「열녀전(烈女傳)」에 등재된 유하혜(柳下惠)의 처 혜자(惠子)가 지은 「혜자뇌(惠子誄)」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뇌는 구법(句法)이 획일하지 못하고 문장도 타당성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문체를 규정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뇌는 『문선(文選)』에 수록된 조식(曺植, 192232)의 「왕중선뇌(王仲宣誄)」와 안연지(顔延之, 384456)의 「도징사뇌(陶徵士誄)」가 명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들은 모두 4언체로, 서술 대상의 세계와 덕행을 앞부분에 서술하고 운문으로 애도를 표하였다. 이러한 4언체가 당대(唐代) 유종원(柳宗元)으로 이어져 뇌의 문체는 4언체로 정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우리나라 ‘뇌’ 양식의 효시로 여겨지며, 그가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는 「종실사공진뇌사(宗室司工珒誄詞)」와 「중서시랑평장사태사소사채공뇌사(中書侍郞平章事太師小師蔡公誄詞)」 등 총 3편의 뇌가 수록되어 있다. 이규보 이후로 1516세기에는 뇌를 창작하는 작가가 드물었으나 17세기에 들어서 다양한 작가군이 등장하였다. 이 작가군은 영남 지역에 편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당파로는 노론 이외의 남인과 소론 계열 인사들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작가 가운데 가장 실험적이고 다양한 체제를 보여준 작가는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이다. 특히 그가 19세로 요절한 홍중유(洪重猷)를 위해 지은 「홍성협뇌사(洪聖協誄辭) 병서(幷序)」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뇌는 첫 부분에 서(序)를 써서 죽은 이의 세계와 행적을 기술한 뒤 4언체로 애도를 표현하는 체재이다. 그러나 송찬(頌讚)이나 비명(碑銘)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송찬과 비명은 추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뇌는 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뇌는 본래 이름 있는 사람의 훌륭한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짓는 글이지만 한미(寒微)한 사람을 위해서 짓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제문(祭文)과의 차별이 적어졌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요절한 사람을 위해 짓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애사(哀辭)와 구별이 모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