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년(문무왕 1) 당나라에서 숙위(宿衛)하던 김인문(金仁問)과 유돈(儒敦)이 돌아와, 이미 출병한 소정방(蘇定方)의 수륙군과 연합해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기를 전하였다.
그리하여 문무왕은 이 해 7월 17일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 김인문 등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천존(天存) 등을 귀당총관(貴幢摠管) 등으로 하는 대군을 일으켰다. 그 때 달관은 술실(述實)·문영(文穎)과 함께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이 되어 출정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의 공격으로 먼저 이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전개해, 문무왕의 지휘 아래 9월 25일 옹산성(甕山城)을 포위한 뒤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9월 27일 대책(大柵)을 불태워버리고 수천 인을 죽인 뒤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이 공로를 치하해 각간(角干)·이찬(伊飡)으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칼을 하사하고, 잡찬(迊飡)·파진찬(波珍飡)·대아찬(大阿飡)으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을 하사함에 달관에게는 창을 하사하였다.
그 뒤 670년 7월에 백제 유민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도리어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신라를 정탐하게 하자, 문무왕은 달관을 비롯한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다. 품일(品日)과 천관(天官) 등은 63성을 빼앗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으며, 천존(天存)과 죽지(竹旨)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을 목 베었다. 그리고 군관(軍官)과 문영(文潁) 등은 12성을 빼앗고 7천 명을 목 베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개선 후 중신·의관(義官)·원흥(元興)과 함께 달관이 전투중 후퇴했다 해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용서받아 면직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