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남북국시대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둘째 아들인 왕자.
개설
생애 및 활동상황
무왕은 이를 듣지 않고 진군을 강행시켰다. 그러나 대문예는 흑수말갈과의 경계 지역에서 다시 글을 올려 중단할 것을 간하였다. 그것을 들은 무왕은 크게 노해 대일하(大壹夏)와 교체한 뒤 그를 불러들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대문예는 두려워서 당나라로 망명해 당나라로부터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받았다. 무왕은 마문궤(馬文軌) 등을 당나라에 보내어 그의 죄상을 말하고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현종은 그를 안서(安西 : 지금의 新彊省)에 머무르도록 하고, 발해에 이도수(李道邃) 등을 보내어 의리상 죽일 수 없어 영남에 유배했다고 알렸다. 그러나 대문예에 대한 당나라의 후대를 알게 된 무왕은 다시 이진언(李盡彦)을 보내어 대국으로서의 거짓을 꾸짖으며, 대문예를 죽일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현종은 이도수가 그 관속들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감독 못한 죄를 물어서 조주자사(曹州刺史)로 좌천하는 한편, 발해에는 최심읍(崔尋挹)을 보내어 서신으로 형제간의 우의를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무왕은 732년 장수 장문휴(張文休)에게 명해 해적을 이끌고 등주(登州 : 山東省蓬萊縣)를 공격해 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고, 군의 일부를 나누어 유주(幽州 : 지금의 北京)로 진군하게 해 그 부근을 불안에 몰아넣었다가 물러갔다. 그러자 당나라에서도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개복순(蓋福順)과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모아서 치게 하고, 그 다음 해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김사란(金思蘭)을 신라로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무왕의 대문예에 대한 울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자객을 모집해 낙양 천진교(天津橋) 남에서 대문예를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대문예는 끝내 발해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 『신당서(新唐書)』
- 『발해정치사연구(渤海政治史硏究)』(송기호, 일주각, 1996)
-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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