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굴도리집.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의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하였던 곳으로, 1904년의 화재로 원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긴 댓돌을 높이 쌓은 기단 위에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4각형 기둥을 세웠다. 기단 앞 가운데 5단 계단을 두 곳에 설치하였다. 1층 평면의 구성을 보면 바깥두리기둥은 평주(平柱), 쪽두리기둥은 고주(高柱)를 세우고, 평주와 고주의 사이인 퇴(退) 부분은 위치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부여하였다.
대청 앞쪽 2칸 위 퇴는 개방하고 그 양옆은 모두 문과 창을 달아서 독립된 구역을 설정하였는데, 이는 퇴의 안쪽에 대청이 있는 경우와 방이 있는 경우를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또, 대청이나 방을 더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 건물 뒤쪽에 가퇴(假退)를 덧단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맨 왼쪽 방에 설치하여 놓았다. 아래층 기둥머리 위에는 당초무늬를 조각한 초익공을 두었으나 쇠서는 생략하였고, 위층 기둥머리 위에는 공포를 두지 않아 민도리집 형식을 쓰고 있다.
창호는 가퇴에만 격자살창을 쓰고 나머지 부문에는 모두 띠살창을 사용하였다. 처마는 1·2층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은 우진각이다. 지붕마루에는 양성을 하지 않고, 착고막이·부고·적새·수키와 등을 켜로 쌓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아무런 장식기와나 잡상 등을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