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2·3·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으로 개방하였으며, 대청은 침전에서 흔히 쓰는 3칸대청이 아닌 2칸대청이다. 대청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다시 그 옆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여 즉조당의 누마루와 구성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기둥 위는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주두(柱枓 : 대접받침)를 놓아 보머리[樑頭]를 받치고 있다. 또, 끝이 둥글게 된 보머리 밑에는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草刻)된 부재를 내어 이를 받치고 있는 초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小累]들을 놓아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柱心道里)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용두(龍頭)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앞과 뒤의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온돌방과 이를 둘러싼 툇간에는 井자살로 된 창호들을 달았다. 또, 온돌방에 딸린 굴뚝[煙堗]은 뒤편에 따로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 연가(煙家)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종래 화재가 난 뒤 경효전(景孝殿)과 흠문각(欽文閣)에 모셔져 있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준명전(濬明殿)과 그 서행각(西行閣)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명당은 불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그러나 이는 준명전과 준명당을 같은 건물로 착각한 데서 온 잘못된 판단이며,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보면 현재의 준명당은 1904년에 중건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건 이전의 준명당은 1897년에 지은 건물이고, 즉조당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므로 두 건물은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중건되면서 새롭게 전체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평면구성을 제외한 구조·색채·형태 등에서 통일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후원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후원 조경방법을 일부나마 전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