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만주 환인현(桓仁縣) 성내(城內)에 이주한 대종교인 윤세용(尹世茸)·윤세복(尹世復) 형제가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경상남도 밀양 출신 윤세복은 형 윤세용과 국외 망명을 결정한 뒤, 1911년 가산을 정리한 뒤 독립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심신이 단련된 인재의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아 그해 음력 5월에 동창학교를 개교하였다.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국권 회복을 기약한다는 취지에서 학교 이름을 ‘동창(東昌)’이라 정하였다.
교장은 이원식(李元植), 교사에는 박은식(朴殷植), 이극로(李克魯), 김영숙(金永肅), 김규환(金奎煥), 이시열(李時說), 김진호(金鎭浩), 김석현(金錫鉉), 신채호(申采浩)가 있었다. 학생은 100여 명으로 대부분 이주 동포의 자제들이었다.
교과서는 단군사상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아, 역사·국어·한문·지리 등을 가르쳤으며, 교내에 기숙사도 설치했다. 그러나 이주한 동포들의 생활이 매우 곤궁하여 기숙사비와 피복비도 학교측에서 지급해 줄 정도였다.
대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1911년 종교취체(宗敎取締)로 본격화되고, 동창학교도 줄곧 감시를 받았다. 1914년에 이르자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던 일본영사관은 중국 관헌과 교섭해 학교 폐지와 교사 축출령을 내렸고, 동창학교는 끝내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동창학교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맥락을 함께 한 학교로서 민족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