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어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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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망을 사용하여 어류나 기타 수산물을 획득하는 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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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어망을 사용하여 어류나 기타 수산물을 획득하는 어업.
내용

망어업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이를 분류할 수 있으나 망어구의 종류에 따라 이를 분류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망어구는 다양하나 이는 보통 여덟 종류로 분류되고 있다. 자망류(刺網類)·엄망류(掩網類)·초망류(抄網類)·인망류(引網類)·선망류(旋網類)·부망류(敷網類)·건망류(建網類)·망롱류(網籠類)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유형별로 분류하고 자망류를 사용하는 어업을 자망어업, 엄망류를 사용하는 어업을 엄망어업 등으로 부르며, 이들은 조업방법이나 어획대상에 따라 명칭이 다시 세분된다.

예컨대, 자망어업은 조업방법에 따라 저자망어업(底刺網漁業)·부자망어업(浮刺網漁業)·유자망어업(流刺網漁業)·선자망어업(旋刺網漁業) 등으로 나누어지고, 어획대상에 따라 꽁치자망어업·명태자망어업 등으로 나누어진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연근해 망어업을 대표하는 것은 인망류 어업에 속하는 기선저인망어업과 선망류 어업에 속하는 기선건착망어업이고, 원양망어업을 대표하는 것은 인망류 어업에 속하는 트롤어업(trawl漁業)이다.

우리 나라 망어업의 역사는 아득한 선사시대로 소급된다. 구석기시대는 논외로 하더라도 신석기시대에는 그 초기부터 이미 어망으로 어획하는 망어법이 알려져 있었다. 이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선사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각종 어망추(漁網錘)이다.

어망은 일반적으로 망지(網地:그물감), 벼릿줄, 부자(浮子:뜸)와 침자(沈子:발돌)로 만들어지나 과거에는 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식물섬유나 목재로 만들어졌으므로 남아 전해지지 않으며, 침자로서 돌 또는 흙으로 만든 어망추만이 전해진다.

세계 여러 문화권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어망추는 토기의 파편에 간단한 가공을 한 토기편추(土器片錘), 자연석을 가공한 타제 또는 마제의 석추(石錘), 흙을 구워 제조한 토추(土錘)들이며, 녹각(鹿角)과 같은 동물의 골각으로 만든 것도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어망추는 주로 석추와 토추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에 의하면, 대동강반의 용반리패총(龍磻里貝塚)에서 석추 1개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이 보고서에는 강동군 마산면의 대동강반에서 발견한 석추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그것은 타원형의 편평한 자연석 양단에 홈을 판 것으로 당시의 투망(投網) 등에 사용되고 있던 어망추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하며, 그러한 석추는 당시까지도 아시아 동북방 및 북미의 토인들이 사용하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강원도 통천의 유적에서 그러한 석추가 한 곳에 많이 군집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 바 있었던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 이후 석추는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분포지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있음이 밝혀졌다.

북으로는 함경북도 경흥의 나진패총(羅津貝塚)이라든가 평안북도 의주 미송리(美松里) 유적에서 발견되며, 남으로는 부산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송리 유적에서 즐문토기 파편과 함께 출토된 석추는 자그마한 강자갈의 두 모를 쪼아내어 줄을 맬 수 있게끔 만든 것이었다.

평안남도의 청호리(淸湖里)나 궁산리(弓山里)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작은 역석의 네 변을 쪼아내어 만든 석추도 출토되었으나, 전기 미송리 출토 석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석 양단에 타격을 가해서 만든 역석추(礫石錘)가 가장 흔한 석제 어망추였다.

과연 그것이 모두 어망추로 사용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나, 그것들이 주로 대동강·한강 등의 강반(江畔)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어망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석추 가운데는 조어구(釣漁具)의 추석(錘石)으로 사용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석추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한강 유역 유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반 저지(低地)에서 일어난 유문토기문화의 표지적(標識的) 유적인 암사리(巖寺里)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시에 구릉(丘陵)에서 일어난 무문토기문화의 표지적 유적인 도곡리(陶谷里)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군 인지면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어망추로 보이는 마제의 석추가 출토된 바 있다. 그것은 홈과 구멍을 겸유한 특이한 것이었다. 앞으로 마제 석추도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추는 유구토추류(有溝土錘類)와 관상토추류(管狀土錘類)가 여러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전자의 일반적인 형태는 타원형 토추의 장축(長軸)을 일주하는 깊은 장축구(長軸溝)를 판 것으로 횡단면이 8자형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유구토추는 한강 유역 선사시대 유적에서 특히 많이 발견된다. 이 유구토추는 무문토기문화와 관련성이 깊다. 무문토기의 대표적 유적인 도곡리 유적에서는 유구토추가 22개나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10개는 황토색 또는 적갈색이었고, 나머지는 흑색 10개, 회백색 2개였다. 무문토기문화는 농경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것은 반월도(半月刀)가 무문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데, 반월도가 농경과 연관성이 있음은 중국의 용산문화(龍山文化)에서 입증된 바이다.

주로 어로활동을 통해 식량을 획득하는 경제생활을 했던 즐문토기인들은 굴·대합 등의 각종 패류를 포획하는 동시에 조어구로써 어류를 조획하는 한편, 석추를 단 망어구로도 어류를 망획하여 주요 식량원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구토추를 많이 사용한 무문토기인들은 반농반어(半農半漁) 형태로 농경과 함께 어로도 했던 것이며, 때로는 수렵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식량 공급원은 수산물이었을 것이다. 유구토추 중에는 이형(異形)으로서 부수공(附隨孔)이 뚫린 것도 출토된다.

이는 장축을 일주하는 장축구를 파고 이에 직교공(直交孔)을 뚫은 것으로 한강반의 흔암리(欣巖里)·도곡리 유적과 전라남도 광주 용강(龍江) 무문토기 유적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러한 유구 직교공 토추는 형태학적으로는 전기 무공 유구토추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한 걸음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출토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시기적으로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동삼동이나 함경북도 웅기에서는 토추의 양단에 단축구(短軸溝)가 있는 이형 토추가 발견된 바 있다. 이들에 대한 형태학적 문제와 편년(編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관상토추는 횡단면이 원형을 지니는 장타원형, 때로는 원주형의 토추에 장축공(長軸孔)을 뚫은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유구토추류와 반출(伴出:동일한 유적의 동일한 층위, 또는 동일한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되기도 하나 시기적으로는 유구토추가 앞서며, 관상토추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 특히 많이 출토되고 있다.

1980년에 발굴된 김해 부원동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다수의 관상토추가 출토되었으나 유구토추는 출토되지 않았다. 관상토추 중에는 현대에 제조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많다. 관상토추와 함께 구상(球狀)의 토추에 구멍을 뚫은 유공구상토추도 출토되는데, 이는 관상토추의 변형으로 보인다.

관상토추는 유구토추와 반출되기도 하나 양자는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조몬시대(繩文時代) 유적에서 주로 각종 유구토추가 출토되고, 관상토추도 조몬시대 유적에서 더러 출토되지만 그것은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이후부터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국 황하 유역의 용산문화에서 발생한 관상토추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추는 후일 도제(陶製) 어망추로 발전하고, 최종적으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납으로 만든 어망추로 발전하였다.

선사시대에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편망용석기(編網用石器)가 출토되고 있는 것에 의해서도 방증(傍證: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는 없지만 주변 상황을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구실을 하는 증거)된다. 미사리(渼沙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분암제(玢巖製) 망침(網針)이 출토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선사시대의 망지는 남아서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압형문토기(押型文土器)에 나타나 있는 그물의 문양을 통하여 당시의 망지형태를 엿볼 수 있다. 서기전 4000∼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동삼동패총의 최하층에서는 망지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 압날망문토기(押捺網文土器)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이는 제작면에서 현대의 망지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결절망(結節網) 망지가 당시에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망지가 어망 제작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망사(網絲)의 재료는 칡껍질이나 기타 식물성 섬유였을 것이다.

궁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공골침(有孔骨針)에는 마사(麻絲)가 달려 있었는데, 이로써 미루어 보아 신석기시대에 이미 마사가 망지 재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망어구로 어류를 어획하고 있었고, 그 기술 수준도 상상 외로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어망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에 관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어망추의 규모로 미루어 보아 소형의 어망이 사용되었던 점은 틀림없을 것 같으며, 주로 소형의 인망류에 속하는 후릿그물과 같은 지인망, 어망류에 속하는 투망, 반두와 같은 초망류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 능주에서 출토된 유구토추는 예외적으로 길이 9.2㎝, 무게 197g의 대형 어망추였다. 이는 규모가 상당히 큰 대형 지인망류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지인망을 사용한 어업은 마을공동체를 단위로 한 공동경영형태로 행해졌을 것이다.

망어업은 하천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았고, 해면에서는 내만(內灣)의 천해에서 망어업이 성하였다. 어망추를 사용하지 않은 각종 망어업도 행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에는 잡속어조(雜俗魚條)에 망어업에 관한 것이 설명되어 있다. 즉, “해인(海人)은 썰물 때에 도서에 닻을 내리고 고기를 잡는다. 그러나 그물을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소포(疏布)로써 이를 걸어서 힘은 많이 드나 성과는 적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소포를 사용했다는 것은 모기장처럼 성기게 짠 베를 망지로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어망이 모두 직망지(織網地)로 만든 그러한 무결절망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고려도경≫의 저자 서긍(徐兢)은 여름철에 서해안을 내왕했으므로 곤쟁이와 같은 젓갈 제조용 소형 새우의 어획 광경을 보고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다.

새우 이외의 어류를 어획하는 데 결절망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망사의 재료는 삼·칡껍질·볏짚 등이었을 것이고, 때로는 견사도 사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면사는 수입하지 않았던 한, 고려 말기를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각종 망어업이 성행했다는 사실은 문헌자료에 밝혀져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라도 영광군의 파시평(波市坪)과 황해도 해주목 연평평(延平坪)의 조기어장에는 어기가 되면 각 처의 어선이 모여들어 어망으로써 조기를 어획한다고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삼을 재배하여 이로써 실을 뽑지 않고 꼬아서 그물을 만들어 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서해안에서는 주요한 조기 망어구였던 주목망(柱木網)이나 중선망(中船網)이 이때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해안에서는 마사제의 지인망류와 같은 어망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에는 여러 가지의 망어구 명칭이 보인다. 1752년(영조 28)의 ≪균역청사목 均役廳事目≫ 해세(海稅) 규정에는 주박(注朴)·휘리(揮罹)·거휘리(擧揮罹)·세망(細網) 등의 어망 명칭이 보인다. 주박은 주목망, 휘리는 후릿그물, 거휘리는 일종의 선망을 말하며, 세망은 청어 어획용 견사제자망이다.

호서(湖西)의 주박에 대해서는 볏짚으로 만든 어망을 조수(潮水)가 진퇴하는 곳에 설치한다고 하는 간단한 어구·어법 설명을 가하고 있다.

≪균역청사목≫의 해세에는 전라도의 해세징수 규정 중에 면휘망(綿揮網)·면변망(綿邊網)·갈망(葛網)·행망(行網) 등이 있는데, 각각 그 길이를 기준으로 과세한다고 한 것이 있다. 이들은 지인망류나 자망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는 면사제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음이 어망의 명칭에 드러나 있다.

이 무렵 하천에서는 밀망(密網)이 많이 사용되어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영조는 이를 금하기 위해 1753년에 밀망 사용을 금하는 동시에, 이러한 폐단의 근본 원인을 없애고자 밀망을 만드는 사람을 도배(徒配:1년에서 3년까지 복역하는 도형에 처한 뒤에 귀양을 보내는 것)의 중벌로 다스리라고 명하였다(승정원일기 영조 29년 7월 19일).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망어업이 상당히 발달하여 망어구 설치 어장은 토지와 마찬가지로 권문세가의 점탈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장의 매매도 성행하였다. 어장 매매의 성행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매매문기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의 주요 망어구는 줄시·장시·거망과 같은 대형 정치망류를 비롯하여 주목망·설망·중선망·궁선망·망선망·지인망류·자망류 등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 나라 재래식 망어구였다.

개항 이후 각종 일본식 망어구가 보급되었다. 많이 보급된 일본식 망어구는 안강망(鮟鱇網)·수조망(手繰網) 등이었고, 대부망(大敷網)·각망(角網)·호망(壺網)·소대망(小臺網) 등 건망류에 속하는 정치망도 보급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는 일본에서 수입된 면사제 망지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는 1890년대 말부터 근대 공장제공업적 면방적업이 발달되어 원사(原絲)가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편망기(編網機)가 보급되었으므로 면사제 망지가 염가로 양산되어 급속도로 전국에 공급되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과거의 고승제(藁繩製)·갈피제(葛皮製)·마사제(麻絲製) 어망은 질적으로 월등히 우수한 면사제 어망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망어업에서 혁명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선건착망어업과 기선저인망어업이 근대적 대규모의 망어업으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전자는 미국에서 발명되어 일본을 거쳐 도입된 것이었고, 후자는 일본에서 발달되어 전파된 것으로 각각 정어리어업과 명태어업의 왕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업들은 일본인 어업자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선 동력화는 망어업에 기술혁신을 일으켰으며, 우리 나라에서의 어선 동력화는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합성섬유제 어망이 사용되기 시작함으로써 망어업 발달에 신기원을 열었다. 그것은 망어구 발달사에서 면사망의 보급보다 훨씬 더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어군탐지기가 도입됨으로써 망어업의 생산성을 급격히 높이기도 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원양어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으며, 오늘날 원양어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망어업은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이를 대표하는 것은 선미식(船尾式) 트롤어업으로 그 규모가 망어업 중에서 가장 크다. 북태평양의 명태어업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고 있는 이 어업은 우리 나라 원양어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어업

참고문헌

『한국수산업사』(박구병, 태화출판사, 1966)
『한국수산사』(수산청, 1968)
『한국어업사』(박구병, 정음사, 1975)
『어구어법학』(고관서, 고려출판사, 1975)
「한국어업기술사」(박구병, 『한국문화사대계』 Ⅲ,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9)
「한국선사·원사유적출토-어구례-」(최몽룡, 『고문화』 9·11·12,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72·1973·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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