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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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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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멸치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개설

학명은 Engraulis japonius TEMMINCK et SCHLEGEL이다. 몸은 작으나 그 생김새가 늘씬하며 아래턱이 위턱보다 훨씬 짧다. 몸빛은 등쪽이 암청색이고 배쪽이 은백색이다. 비늘은 크고 엷어 떨어지기 쉽다. 멸치는 연안 회유어(洄游魚)로서 우리 나라의 전 연안에 분포하며 다획성 물고기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문헌 기록

조선시대 후기에는 대량으로 어획되고 있었음이 문헌 자료를 통하여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 전기나 그 이전에도 많이 잡히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경도 예원군(預原郡)과 길주목의 토산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의 토산으로 실려 있는 행어(行魚)를 멸치로 보는 설도 있으나, 강원도나 다른 주요 산지의 토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이와 같이 멸치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상기한 한두 지방에서만 어획되었거나, 타 지방에서도 어획되었으나 중요한 물고기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식성이나 다른 이유에 의하여 많이 어획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어망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았을 때는 멸치가 함께 혼획된 일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에는 멸치가 다획성 물고기의 위치를 굳히고 있어서 1803년에 김려(金鑢)가 지은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에도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멸치를 멸아(鱴兒)라고 하고, 이 멸아는 진해지방에도 나는데 본토박이는 그 이름을 기(幾:몇 기)라고 하며, 그 방언은 멸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인(海人)의 말을 전하여 말하기를 멸아도 정어리처럼 장람(瘴嵐:독기를 품는 산과 바다의 기운)이 변하여 생긴 것인데 더운 날에 안개가 짙게 낄 때에 조수가 솟는 곳에 가서 삼태 그물로 건져올린다고 하였다.

1814년에 정약전(丁若銓)이 지은 ≪자산어보 玆山魚譜≫에 의하면 멸치를 한자어로 추어(鯫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멸어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멸치는 불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밤에 등을 밝혀 움푹 패인 곳으로 유인하여 광망(匡網)으로 떠올린다고 하였다.

≪한국수산지 韓國水産誌≫ 제3집에 소개된 흑산도에서의 멸치어업은 위에서 말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멸치를 잡을 때는 간솔이나 잡목을 태워 횃불을 밝히고 멸치 떼를 유인하여 해변가에 다다르면 한 사람이 배에서 내려 이를 떠올리는데 이때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거나 삿대로 수면을 쳐서 멸치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한다고 하였다. 또 때로는 좁은 장소로 몰아넣어 배에서 그물로 떠올려 잡았다고 하였다.

멸치를 잡는 어망은 ‘왜태’라고 하는 원형의 당망(攩網:곤충채집망같이 생긴 자루 달린 그물)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소나무 가지를 휘어서 직경 4, 5자의 테를 만들고 이에 감즙을 먹인 면사제(綿絲製) 그물을 달고 4, 5자의 떡갈나무로 만든 자루를 달아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멸치를 대량으로 잡고 있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므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하였고, 마른 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온(鰮)은 속칭 멸어라고 하며 회를 할 수 있고, 구워 먹을 수 있고, 말릴 수 있고, 기름을 짜기도 하는데 한 그물로 산더미처럼 많이 잡는다고도 하였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에 의하면 동해안에서 멸치가 방어떼에 쫓겨 몰려올 때는 그 세력이 풍도(風濤)와 같고, 어민이 방어를 어획하기 위하여 큰 그물을 치면 어망 전체가 멸치로 가득차므로 멸치 가운데서 방어를 가려낸다고 하였다. 또 멸치는 모래톱에서 건조시켜 판매하는데 우천으로 미처 말리지 못하여 부패할 때는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한말에는 일본으로부터 비료용 마른 멸치의 수요가 많아 멸치 어업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한말의 문헌에 의하면 강원도 연안의 지인망(地引網)에 어획되는 멸치는 1망의 어획으로 마른 멸치 1만여 근을 생산하는 수가 있었고, 함경남도 여도(麗島) 근처에서는 너무 많이 어획되어 어망이 파손되는 수가 있었다고 한다. 1934년에는 4만 7877M/T이 잡혀 기록을 세웠다.

광복 이후에는 2만M/T 내외의 수준을 유지하다가, 1960년대부터 증가하여 1997년에는 23만M/T에 달하는 기록을 세웠다. 현재 우리 나라 연근해 물고기 중에서는 가장 많이 잡히는 것으로서 그 산업적 중요성이 크다. 근래에는 권현망·유자망·정치망·분기초망 등으로 많이 잡고 있다. 주로 삶아서 말린 건멸치·젓갈·염장품으로 널리 이용된다.

참고문헌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자산어보(玆山魚譜)』
『한국어도보』(정문기, 일지사, 1977)
『韓國水産誌』 3(朝鮮總督府, 1910)
『해양수산통계연보』(해양수산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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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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