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은 장씨. 자는 백우(百愚), 호는 석실(石室) 또는 설암(雪巖). 진주 출신. 아버지는 근수(謹守)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12세 때 출가하여 지리산 덕산사(德山寺)성각(性覺)의 제자가 되었고, 15세 때 엄비(掩鼻)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무영(無影)의 문하에서 10년 동안 선과 교를 함께 닦았다. 1672년(현종 13) 가을에 무영이 죽자 전국의 모든 산을 편력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황령선사(黃嶺禪社)에서 교화하고 있던 백암 성총(栢庵性聰)이 편지를 보내 명안을 불렀으므로, 백암을 4년 동안 모시면서 화엄원융(華嚴圓融)의 뜻을 전해 받았다.
1678년(숙종 4) 백암의 명을 받고 방장산 불장암(佛藏庵)에 주석하였다. 그가 불장암에서 개당(開堂:가르침을 폄.)하자 많은 승려들이 몰려와 배우기를 청하였고, 그는 당시 호남의 종장(宗匠:큰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뒤 안국사(安國寺)의 금대암(金臺庵), 지리산의 심적암(深寂庵), 오대산의 내원암(內院庵), 방장산의 대원사(大源寺)·율곡사(栗谷寺), 삼신산의 신흥사(神興寺)·화엄사(華嚴寺)·감로사(甘露寺)·연곡사(燕谷寺) 등지에 머물면서 수선(修禪)에 몰두하거나 설법하였다.
만년에는 오직 염불왕생문(念佛往生門)에 귀의하여 정토(淨土)에 태어나고자 하였다. 1709년 지리산의 칠불암(七佛庵)에 주석하면서 7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서방도량(西方道場)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겨울 회계의 왕산사(王山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4월 13일 서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입적하였다. 세수 64세, 법랍 52세이다.
27일 뒤에 절 서쪽 원통동(圓通洞) 위에서 화장할 때 2편의 정골(頂骨)이 나왔으므로 1편은 제자 전명(雋明)이 절 북쪽에 석종형(石鐘形)의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고, 나머지 1편은 원준(圓俊)이 대원사 남쪽 시냇물 위에 무덤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명안은 1690년 가을 대원사에서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을 판각하였고, 1705년 가을에는 『반야심경약소연주기(般若心經略疏連珠記)』를 감로암 약사전(藥師殿)에서 편찬하였다. 그리고 교(敎)를 「사교행위도(四敎行位圖)」에서 소승교(小乘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로 교판하였다.
그리고 끝에 대승원교(大乘圓敎)에 대해, “비록 그 위차(位次)가 있다고 하나 그 모두는 원교에 포함된다. 원교행인(圓敎行人)은 마치 산 위를 날아가는 새와 같다.”고 하여 화엄원교의 종지(宗旨)를 천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만년에 염불로써 정토왕생을 구했는데, 그의 문집인 ≪백우집 百愚集≫에 염불가(念佛歌)가 전하고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는 물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동안이나 꿈속에서도 나무불[南無佛]을 염해 정토왕생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의 정토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법을 이은 제자는 14명이고, 그 중에서도 청윤(淸胤)과 태휘(太暉)가 고족(高足)이다. 저서로는 유고를 모아 문인들이 편찬한 ≪백우수필 百愚隨筆≫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