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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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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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내용

민어(鰵魚)·면어(鮸魚)라고도 하였다. 학명은 Miichthys miiuy이다. 몸은 옆으로 납작[側扁]하고 아래턱은 위턱보다 짧으며, 턱에 2쌍의 구멍이 있다.

꼬리지느러미는 길고 참빗 모양을 하고 있다. 몸빛은 등쪽이 회청색이고, 배쪽은 연한 흰빛이다. 몸길이는 90㎝에 달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에 분포하며 동해안에는 없다. 경기도의 덕적도 연해와 전라도의 신도 연해에서 많이 잡힌다.

민어는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물고기이며, 그 어업의 역사도 깊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에는 민어(民魚)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경기도와 충청도의 여러 곳에서 잡혔고, 전라도·황해도 및 평안도에서도 잡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여러 읍지(邑誌)에도 전라도·충청도·황해도 및 평안도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민어를 면어(鮸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민어(民魚)라고 하였으며, 민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큰 것은 길이가 4, 5자이다. 몸은 약간 둥글며 빛깔은 황백색이고 등은 청흑색이다. 비늘이 크고 입이 크다. 맛은 담담하고 좋다. 날 것이나 익힌 것이나 모두 좋고 말린 것은 더욱 몸에 좋다. 부레로는 아교를 만든다.

흑산도 바다에는 희귀하나 간혹 수면에 떠오르고, 간혹 낚아서 잡는다. 나주(羅州)의 여러 섬 이북에서는 5, 6월 그물로 잡고 6, 7월 낚시로 잡는다. 그 알주머니는 길이가 수 자에 달한다.

젓갈이나 어포가 모두 맛이 있다. 어린 새끼를 속칭 암치어(巖峙魚)라고 한다. 또, 1종이 있는데 속칭 부세(富世)라 하며 길이가 2자 남짓할 정도에 불과하다.”

이를 통하여 민어가 옛날부터 유용한 물고기로 취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민어를 한자로 민어(鰵魚)라고 쓰고, 서·남해에서 나며 동해에는 없고 모양이 조기[石首魚]와 유사하나 그 크기가 4, 5배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레는 교착력이 강하여 전국의 공장(工匠: 물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아교가 모두 민어의 부레라고 하였다. 또, 민어의 알젓은 진귀한 식품이고 민어의 염건품(鹽乾品)은 손님 접대용이나 제수용으로 쓰인다고 하였으며, 관서지방 사람은 담상(淡鯗), 즉 소건품(素乾品)을 만드는 데 그것은 더욱 좋다고도 하였다.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제1집(1908)에는 조선 말기의 민어 어업의 실태가 잘 소개되어 있다. 민어의 산지에 대하여 “민어는 서남해에 많고 동해에 이름에 따라 점차 감소하여 강원·함경도 연해에 이르러서는 거의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장은 “완도·진도·태이도(苔耳島)·칠산탄(七山灘)·격음열도·인천·진남포·연평열도·압록강이고, 가장 주요한 어장은 목포 근해 태이도, 금강 강구(江口), 군산 근해 및 압록강 강구”라고 하였다.

또, 태이도는 고래로 민어의 산지로서 유명하였고 우리나라 사람은 각종 재래식 어구로써 어획하고 있었는데, 1906년에 일본 어민이 태이도에서 안강망(鞍鱇網)을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둔 뒤 이를 전하여 들은 안강망 업자들이 속속 들어와서 그 어선 수가 40여 척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용하였던 민어 어구는 일본조(一本釣)와 연승이 주였고 때때로 주목망(柱木網) 및 중선망(中船網)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민어의 염건품은 조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식품으로서, 음력 7월의 관월제(觀月祭)와 8월의 우란분(盂蘭盆: 夏安居의 끝날인 7월 보름날에 행하는 불사) 때는 조기와 함께 민어를 사용하는 풍습이 있어 그 판로가 매우 넓고 값도 싸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민어의 값은 태이도 어장에서 한 마리에 큰 것은 15전, 작은 것은 10전이었는데 부레가 4전 내외였다고 한다. 부레가 아교의 좋은 원료로 그 값이 비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어의 어획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는데 최고기록을 수립하였던 1924년에는 근 2만M/T이 어획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연간 수천M/T이 어획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약 20년간에는 연평균 2,000∼3,000M/T 정도의 어획수준을 유지하여 왔고, 가장 많이 잡힌 1964년 4,174M/T이 어획되었으나 그 뒤에는 감소경향을 보였고, 최근 약간 상승하여 2,000여M/T에서 3,000여M/T이 어획되고 있다.

1992년에 2,272M/T, 1997년에 1,177M/T이 어획되었다. 이는 대형 기선저인망이 동원되어 어획하는 등 어획노력이 증투(增投)된 결과이며, 민어의 자원은 옛날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

참고문헌

『자산어보(玆山魚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해양수산통계연보』(해양수산부, 1998)
『한국어도보』(정문기, 일지사, 1977)
『韓國水産誌』 1(朝鮮總督府, 1908)
집필자
박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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