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대수(大殊), 호는 운암(雲菴)·운재(雲齋)·징암(懲菴). 평안도 태천(泰川)출신. 박도정(朴道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통정대부 김태려(金泰呂)의 딸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1866년(고종 3) 사복시주부(司僕寺注簿)·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188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의 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전통적 유학자로 오직 도학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자주 서울에 출입하였으나 권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말 한 필로 상경하여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더불어 나라 일을 걱정하기도 한 기개가 있었다.
1882년 요동(遼東)에 전쟁의 화기(禍機: 재변이 드러나지 않고 잠겨있는 기틀)가 박두할 기색이 있자, 고향인 태천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게 하고 병기를 갖추어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같은 문인인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과 교분이 두터워 경전에 관한 문답의 서신 내왕이 많았으며, 임헌회(任憲晦)와는 이기설(理氣說)에 관한 의견 교환을 많이 하였다. 사서에 대한 해석인 「경의해(經義解)」를 잡저로 남겼으며, 저서로는 『운암집(雲菴集)』 12책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