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이른 시기에 전기통신 기술을 습득하고 일제시기 군수를 거쳐 도지사까지 오른 인물이다.
1877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20세때인 1898년 12월 안주전보사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전보사는 전기통신을 관장하는 농상공부 산하의 관청으로, 1896년 7월 23일에 설치되고 1905년 통신원에 편입되었다가 1906년에 폐지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전보사를 설치하면서 전기통신 기술을 교육하는 제도와 시험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제도에 적극 호응하여 1900년 5월 30일 한성전보학당 시험에 우등으로 합격하였고, 1900년 6월 금성전보사 주사로 임명되었다. 동년 8월 은산전보사 주사로 전직한 후, 1908년 11월 평남 강동군수로 승진하였다.
박상준은 관직에 있으면서 서북지역의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7년 12월 성천군 사립 동명학교 교감 겸 교사를 지냈고, 1908년 5월 태극학회에 참여하였다. 태극학회는 1905년 동경에서 서북지역 유학생들이 조직한 계몽운동 단체로 1907년 2월 국내로 세력을 확장하여 지회를 설치한 후 1909년 대한흥학회로 통합되었다. 태극학회 국내 지부가 설치될 때 평남 성천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1908년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의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0년 2월 평남 순천군수를 거쳐 1917년 11월 평원군수를 역임하였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자 평남지방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고, 1919년 11월 다시 평남 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921년 2월 평안남도 참여관이 되었고, 1926년 8월 강원도지사로 승진하였다. 1927년 5월 함경북도지사를 지냈고, 1928년 3월부터 1929년까지 황해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일제측 자료는 박상준에 대해 ‘충실한 관리로 산업상태에 통달하고 또한 재정금융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고위 관료를 차례로 지내며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1921년 3월부터 1929년 6월까지 훈6등에서 훈3등에 이르는 네 차례의 서보장을 받고, 1929년 11월 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종4위, 같은 해 12월 정4위에 서훈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여러 외곽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였다. 1929년부터 1945년 6월까지 15년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또한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산업부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 6월 중추원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평의원에 선임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고, 1941년 8월 일본 천황정신의 고양을 강령으로 내건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어 그 단체를 계승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감사를 지냈으며, 침략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애국 특별채권 가두 매출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0년 10월부터 경학원대제학 겸 조선유도연합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일본군 승리 기원제를 주관하고 수차례 전쟁협력을 당부하는 시국강연 활동을 하였다. 잡지와 신문에 황도유학을 선전하고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수편의 글을 발표하였으며, 총독과 정무총감을 칭송하는 한시를 지어 헌납하였다. 또한 1943년 경학원이 주관한 비행기, 현금, 제기 등을 일본군에 헌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2년 5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징병제 실시기념 대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하고, 1943년 1월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한 한시집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한시를 실었으며, 같은 해 8월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내용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1943년 5월에는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조선 청소년의 입대를 선동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박상준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8·9·11·13·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79~32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