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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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삼
박성삼
공예
인물
해방 이후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미술협회고문, 한국공예가회고문 등을 역임한 공예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사망 연도
1987년
본관
울산(蔚山)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미술협회고문, 한국공예가회고문 등을 역임한 공예가.
개설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목양(木羊).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치운(致雲)의 차남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金祭)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고향에서 한학을 익힌 후 부산보통학교(1922년), 평양동명학원(東明學院) 고등부(1925년)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만주 안동(安東)에 있던 일본인 목공예가 다케이시쇼비(武石壯美) 사숙에 입문하여 5년 동안 목조와 공예를 익혀 목공예가의 바탕을 쌓고, 1942년부터 두 번 연속 선전[朝鮮美術展賢會]에 입선하여 공예가로 등단하였다.

활동사항

광복 직후 서울로 월남하여 최순우(崔淳雨)·박수근(朴壽根) 등과 교우하며 작품생활에만 전념하였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부터 국전에 계속 출품하였으며, 이후 추천작가·초대작가로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신인예술상전·동아공예대전·불교미술전·신라미술대상전 등 중요 공모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회원으로 잠시 목판화에 손을 대기도 했으나, 1966년 ‘목양공방’을 새로 짓고 목공예 창작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동안 공예작가동인전(1955년)·대한미술협회전(1956년)·일본국제자유전(1961년)·상공미전(1972년)·공예가초대전(1974) 및 국립현대미술관의 각종 기획초대전과 한국공예가회전 등 많은 주요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며, 서울시문화위원(1954년)·문화재전문위원(1973년)·한국미술협회고문(1973년)·한국공예가회고문(1984년)을 역임하고, 서울시문화상(1960년)과 은관문화훈장(1982년)을 받았다.

철저한 장인(匠人) 기질의 성향이 잘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완벽한 재료의 선택과 건실한 구조·제작기술을 우선으로 한 실용적 가구가 대부분인데, 만년의 작품에서는 목재의 자연적 형태와 색채·나뭇결을 최대한 활용한 자연주의적 낭만과 해학이 곁들여진다.

조선조 목가구의 뛰어난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으로 전통공예의 우수성을 계속 탐구했고, 광범한 국산목재의 수집·활용에 대한 연구와 세대를 초월한 격의 없는 열성적 대화는 후진 목공예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만년에는 제주도에 ‘제주토속민예연구원’을 차리고, 후진들을 위해 개방할 공예공방 개설계획을 추진하려던 중 지병으로 타계하여 경기도 파주의 나사렛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미술사』-공예-(국립현대미술관,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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