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方魚·舫魚)라고도 하였다. 학명은 Seriola quinqueradiata TEMMICK et SCHLEGEL.이다.
몸은 긴 방추형이고 약간 옆으로 납작[側扁]하다. 제1등지느러미는 아주 짧고, 제2등지느러미는 매우 길다. 비늘은 작고 둥글다.
몸빛은 등쪽이 철색(鐵色)을 띤 청색이고 배쪽은 은백색인데, 주둥이에서 꼬리자루까지 담황색의 불선명한 띠가 있다. 몸길이는 1m 가량이다.
우리 나라의 동해안과 남해안에 많이 분포한다. 방어떼는 5월 초순부터 한여름까지 북상, 회유(洄游)하고 늦여름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는 사이에 남하, 회유한다.
세종 때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에는 방어가 동평현(東平縣)의 토산공물조에 실려 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상도 동래현의 토공조에 기재되어 있으며, 함경도 몇몇 지방의 토산조에도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상도·강원도 및 함경도 각 지방의 토산에 방어(魴魚)가 들어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37년(세종 19)의 호조의 보고 가운데 각도의 주산 어류를 열거한 것이 있는데, 방어는 대구 및 연어와 함께 함경도·강원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물고기로 되어 있다. 이 때 이미 강원도 이북의 동해안에서는 방어가 중요한 수산물의 하나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에서는, 방어는 동해에서 나는데 관북·관동의 연해와 영남의 영덕·청하 이북에 모두 방어가 있다고 하고, 그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데 큰 것은 6, 7자에 달한다고 하였다.
또 살빛은 정적색(正赤色)이나 염장(鹽藏)하면 담적색이 되며, 소아가 과식하면 취한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에는 길이가 1장(丈)이 넘고 둘레가 10아름이나 되는 큰 방어가 있는데 살에는 지방이 많으므로 관북의 어가에서 이를 잡아 기름을 채취한다고 하였다.
방어는 남획되기 이전에는 그 자원이 아주 풍부하였다. ≪조선통어사정 朝鮮通漁事情≫에 의하면 동해안에서 가을에 멸치떼를 좇아 해안에 접근하는 방어떼는 너무 커서 멸치를 잡으려다 방어떼의 방해를 받는 수도 있었다고 하며, 강원도에서는 멸치와 방어를 함께 잡기 위하여 그물을 친 일이 있었는데 방어의 대군이 걸려들어 그물이 무거워 끌어올리지 못하고 결국 그물이 대파되고 만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해통어지침 韓海通漁指針≫에는 지인망(地引網)으로 방어를 잡는데 1회 사용에 3,000∼4,000마리를 잡는 일이 흔하다고 하였다. 방어 어획량은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급증하여 1924년에는 근 6,000M/T이 잡혔고, 그것이 일제시대의 최고기록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어획량이 감소되는 경향을 보여 연간 1,000M/T에서 3,000M/T 이하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87년에는 4,957M/T이 잡혔다.
방어는 고급어에 속하고 생선회용으로 활어(活魚)나 선도 높은 선어에 대한 수요가 많으므로 그 가격이 비싸다. 가격 등귀로 어획노력(漁獲努力)이 증투(增投)되고 이에 따라 자원은 감소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는 증대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방어 양식이 성행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머지않아 방어 양식업이 성해질 것으로 예견된다.
1987년의 방어 양식량은 1,418M/T에 달하였다. 그리고 일반해면어업에서는 1992년에 2,233M/T, 1997년에 6,064M/T, 양식은 1992년에 287M/T, 1997년에 302M/T이 어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