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白蓮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662년(문무왕 2)에 의상(義湘)이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소암자를 짓고, 백련암(白蓮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692년(효소왕 1) 큰 비가 와서 산사태로 백련지가 파묻히고 암자가 매몰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819년(헌덕왕 11)에 무착(無着)이 백련암의 옛터를 찾아 절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절에 있는 승탑이 형식상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절과 관련된 사료와 유물 역시 고려 말 이후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신라 의상의 백련암 창건설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 창건되었으나 절의 역사적 전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억지로 끌어다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1358년(공민왕 7)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경기도 여주에 신륵사(神勒寺)를 창건한 뒤 백련사를 손질하여 고쳤다. 1587년(선조 20) 벽운(碧雲)이 이 절을 다시 고쳤으며, 1624년(인조 2)에 학린(學璘)이 또다시 수리했다. 1798년(정조 22)에 처봉(處峰)이 다시 고친 뒤, 절 뒷산의 이름을 따서 감악사(紺岳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0년 욱일(旭日)이 절을 다시 손질했으나, 1916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같은 해 10월 감악사의 주지 윤인선(尹仁善)이 산성의 안쪽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겨 새로 짓고 백련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절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1959년과 1962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불전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강당, 삼성각(三聖閣),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내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 제217호인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비롯하여 석고로 만든 아미타좌상과 후불탱화(後佛幀畵),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삼성각 내에는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탱화와 산신상,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 내에 있는 범종과 절의 동남쪽 병풍바위 위에 부도 1기가 있다.
승탑은 절을 다시 지은 무착의 승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승탑의 양식이 전형적인 석종형(石鐘型) 승탑으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승탑이 무착의 승탑이라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 백련사의 전성기에는 인근에 미륵사(彌勒寺), 신흥사(新興寺), 천수암(天壽庵), 은적암(隱寂庵), 청련암(淸蓮庵) 등이 말사로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절 남쪽의 백련지에는 예로부터 백련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절 뒷쪽 석굴에는 금수탕(金水蕩)이라는 약수가 있고, 삼성각 밑에는 구세정(救世井)이라고 불리는 은수탕(銀水蕩)이 있다. 금수탕, 은수탕이라는 명칭은 물 속에 늘 금분과 은분이 깔려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큰 가뭄이 있을 때면 은수탕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며, 약수가 영험하다고 믿는 많은 병자들이 절에 머물며 기도하고 약수를 마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