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의 복장(腹臟) 조사를 통하여 복장유물로 「조상기(彫像記)」와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다라니가 수습되었다. 조상기에 의하여 이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 1736년(영조 2)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본래 단양군 서면 금수산에 있는 조계사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아미타삼존불상의 본존불이었는데, 후대 백련사로 이관되었다 한다.
복장유물 중 「대불정능엄신주」다라니는 목판본으로 판심제가 불분명하고 사주단변(四周單邊)에 계선이 있다. 각 판면 계선 하단 지름 7㎝의 원 안에 ‘卍(만)’자를 새겼는데, ‘卍’자를 새기는 점은 동일한 불상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 제천 정방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다라니에서 나타나고 있어 서로 관련성이 있다. 특히 책의 끝에 “乙亥九月二十一日改刊(을해구월이십일일개간)”이라는 간기(刊記)가 있어 서지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백련사는 치악산의 지맥인 감악산(紺岳山) 정상에 위치한 사찰로, 662년(문무왕 2)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고 819년(헌덕왕 11)에 무착조사(無着祖師)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현재 절 아래의 갈대밭 자리에 있던 연못에서 흰 연꽃이 솟아 피어나 암자 이름을 백련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1358년(공민왕 7)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여주 신륵사를 창건하고 백련사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몇 번의 중수를 거쳐 명맥을 이어오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절이 반파된 이후 중창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아미타여래좌상의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이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는 낮은데 이마 위와 정수리에 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원만한 인상이다. 얼굴은 조선 후기 불상에 비하여 동그란 편이고 이목구비가 단정하여 작은 불신과 더불어 어린아이 같은 인상을 준다. 목 아래쪽은 삼도(三道)가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상체는 당당하지만 평면적이며 어깨가 좁고 가슴은 양감이 거의 없다. 팔은 옷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체와 붙어 있어 경직되어 있다. 왼손과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면서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결가부좌의 하체는 안정되어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가리는 이중착의식 통견형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반원형으로 가리고 있는 부분이 가사(袈裟)이며, 그 아래의 안쪽 옷이 대의(大衣)이다. 가슴 아래 중앙에 보이는 옷은 승각기로 직선적인 띠를 두르고 있어 윗단이 주름져 있지만 띠매듭은 없다. 특히 배까지 늘어진 옷자락은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U자인 데 반하여 凵(감)자처럼 아랫부분이 넓고 직선적으로 표현한 점은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운사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좌상, 1730년(영조 6)작 충주 창룡사 보살좌상, 제천 정방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등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유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옷주름선은 전체적으로 대칭적이며 추상적인 선미감이 두드러진다. 특히 다리 앞쪽의 대칭적인 물결문양의 부채꼴 옷주름선은 매우 추상화되었다. 이러한 추상화 경향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행한 특징이다. 대좌는 현재 통일신라시대 형식의 팔각형의 삼단대좌를 하고 있는데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불상의 배까지 늘어진 옷자락은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U자인 데 반하여 凵(감)자처럼 아랫부분이 넓고 직선적으로 표현된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다리 앞쪽의 대칭적인 물결 문양의 부채꼴 옷주름선은 매우 추상화되었는데, 이러한 추상화 경향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행한 특징이다.
이 불상은 소형의 목조불상이지만, 조상기를 통해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아미타불상 양식을 규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제천 정방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동일한 양식이면서 복장다라니도 유사하여 이 지역의 불교신앙적인 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