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금강암은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이후 고려 말에 중수되었으나 조선 초에 화재로 불타 버리고, 1412년(태종 12) 무학대사의 문인 영암(玲岩) 비구가 궁주 권씨를 위하여 아버지인 영가군(永嘉君) 권홍(權弘) 등과 함께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금강암 중수 시기에 함께 만들어진 석불 1구와 비편 1기가 남아 있다.
석불은 2단의 대좌 위에 앉아 왼손과 오른손을 겹쳐 연꽃 봉오리를 받쳐 들고 있다. 머리 위에는 갓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데, 관은 6각으로, 한가운데에는 보주형 꼭지가 얹혀 있다. 관과 꼭지 모두 결락이 심하다. 관의 형태는 각 모서리에 지붕을 연상시키는 마루가 조각되어 있어, 부도의 상륜부 부재를 후대에 얹어놓은 듯하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귀가 매우 길며 입체감이 거의 없이 부조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마에는 큰 백호 구멍이 있으며, 가늘게 뜬 눈과 눈썹이 매우 길며 인중이 길고, 입술 양끝을 움푹 들어가게 하여 볼의 양감을 표현하였다. 턱은 선 하나를 더하여 이중턱을 나타내었다. 큰 얼굴에 비하여 목은 거의 없다.
하체에 비하여 상체가 길어 조선 초기 세장한 이등변삼각형 구도를 보여 주고 있으며 어깨는 매우 좁다. 좁은 어깨에 비해 손이 매우 크게 표현되었고, 소매에 두 줄의 주름이 둘러져 있다. 손은 가슴에 선정인을 하고 있으며 연봉과 같은 지물을 들고 있다. 연봉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을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불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 착의법을 보이고 옷자락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둥글게 파여 있다. 무릎의 옷주름은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있고 결가부좌한 발 부분을 덮은 옷자락은 둥글게 처리되어 매우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대좌는 높이가 41㎝, 폭은 81.5㎝이며, 하대에 복련, 상대에 앙련이 대칭적으로 조성되었다. 연꽃잎이 각 16개씩 조각되었는데, 연꽃잎 둘레의 선을 이중으로 둘렀으나 입체감은 나타나지 않는다.
출토된 비편의 내용으로 보아 금강암과 석불은 1412년(태종 12) 태종의 제2후비인 궁주 권씨의 아버지 영가군 권홍의 발원으로 궁주 권씨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비편은 금강암과 불상에 관한 사실을 알려 주는 금석문 자료이다. 일부가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의 판명은 어려우나 조성 시기나 내용으로 보아 주목되는 자료이다. 비는 1412년에 건립된 것으로 하단부가 깨어져 없어졌다. 전면에는 한자로 “玲岩比丘創金剛庵碑銘(영암비구창금강암비명)”이라 각서되어 있고, 후면에는 금강암에 관련된 중건 사실 239자가 각서되어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블록처럼 처리된 무릎 부분과 비례가 맞지 않는 평판한 신체, 입체감이 사라진 옷주름과 얼굴 표현에서 조선 초 추상화된 지방 양식 특징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 비편은 일부가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의 판명은 어려우나 조성 시기나 내용으로 보아 주목되는 자료이다.
이 불상과 비편은 그 조성연대와 발원자 등을 알 수 있어 조선 초 불교신앙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미륵불상은 석조불상으로 1412년이라는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어 조선 초 불상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