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6판. 136면. 1941년 문장사(文章社)에서 간행하였고, 1946년 백양당(白楊堂)에서 다시 나왔다. 작자의 제2시집으로, 모두 5부로 되어 있으며 1∼4부에 25편의 시와 5부에 8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1부는 「장수산(長壽山) 1」 · 「백록담」 · 「비로봉(毘盧峰)」 등 18편, 2부는 「선취(船醉)」 · 「유선애상(流線哀傷)」의 2편, 3부는 「춘설(春雪)」 · 「소곡(小曲)」의 2편, 4부는 「파라솔」 · 「슬픈 우상」 · 「별」의 3편, 그리고 5부는 「노인과 꽃」 · 「꾀꼬리와 국화」 등 산문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지용시집』이 도시나 바다를 공간적 배경으로 선택하고 있는 데 비하여 1부에서는 거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산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 머물지 않고 금욕이나 극기의 정신적 특질을 내포한다. 2부의 작품들은 정지용 시의 전기적 풍모를 띤다. 『정지용시집』에도 「선취」라는 시가 있지만 제목만 같을 뿐 내용은 다르다. 3부의 작품은 모두 2행 1연의 형식으로서 한시적(漢詩的) 형태를 취하고 있고, 4부의 작품들은 종교 시편에 가깝다. 5부의 작품들 중 「노인과 꽃」 · 「꾀꼬리와 국화」의 2편은 시적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2편의 산문은 뒤에 『지용시선』에 재록된 것으로 보아 시인 자신은 산문시로 간주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나 지용의 산문 또는 산문체 시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의 여지가 많다.
시집 『백록담』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백록담」이다. ‘한라산소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원래 1939년 『문장』 3호에 처음 발표된 것이다. 한라산 정상의 화구호(火口湖)라고 하는 지상적 차원에서 최정상의 높이를 의미함과 동시에 우리 현대시의 가장 최고의 높이를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확한 산문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율조와 심상(心像)으로 정확하기가 비할 바 없는 시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
화구호는 ‘하늘’과 같은 의미가 되면서 ‘나의 얼골’과 맞닿아 있는데 ‘나’의 기진(氣盡) · 희생 · 고독 · 연민 · 고통 · 수난 · 도취를 통하여 기도조차 망각하는 몰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 화구호는 이제 더 이상 ‘산’과 ‘하늘’이 따로 분리될 수 없으며, 백록담과 순례자가 객체와 주체로 대립될 수 없는 궁극에 자리잡게 된다. 우주와 인간, 세계와 자아의 접합을 이 작품만큼 형상화한 것은 드물다.
「백록담」 외에도 이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된 「장수산 1」과 「장수산 2」는 산문체의 작품이면서도 긴밀하게 짜여진 율조가 특이하다.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띄어쓰기가 1자에서 3, 4자 간격으로 되어 있어서 시인의 의도적인 율격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