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큰 화면에 보살형태의 본존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도 형식의 괘불도로서, 1766년에 두훈(枓薰)을 비롯한 13명의 화승이 제작하였다. 화면 전체에 꽉 차게 묘사된 본존불이 원형 두광과 거신형 신광을 배경으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꽃가지를 받들고 서 있다.
세로 길이가 1,349㎝에 이르는 거대한 화면에 단독의 본존상이 연꽃 위에 두 발을 올리고 두 손으로 꽃을 받쳐 들고 서 있다. 본존불은 둥근 얼굴에 화려한 장식이 달린 보관(寶冠)을 쓰고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배경으로 서있는데, 얼굴에는 살짝 내리뜬 눈과 크고 긴 코, 두툼한 붉은 입술 등이 가늘게 그려져 있다. 몸에는 섬세한 꽃무늬가 시문된 흰색의 군의(裙衣)를 입고 그 위에 원형의 화문이 묘사된 붉은 가사를 걸쳤다. 가슴 앞에는 복잡한 형태의 장식적인 목걸이와 옷주름이 복잡하게 표현되었는데, 왼팔은 가슴 앞에서 아래로 내려 연꽃줄기를 받치고 있고 오른팔은 위로 올려 비스듬하게 뻗은 연꽃가지를 잡았다. 두광은 진한 청록색으로 칠했으며 신체를 따라 길게 표현된 신광의 내부에는 갖가지 꽃과 구름이 장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어깨가 넓고 얼굴이 큰 데 비해 다리 부분은 가늘고 작게 표현되어 언뜻 보면 불균형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아래쪽에서 괘불을 올려다 볼 때 나타나는 시각적인 효과를 의식한 결과로 생각된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그 외 중간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모든 색들이 채도가 높으면서도 들뜨지 않아 차분한 느낌을 준다.
조선후기의 괘불도 가운데 법주사 괘불도처럼 보관을 쓰고 꽃을 든 존상을 표현한 작품은 무량사 괘불도(1627년)를 시작으로 장곡사 괘불도(1673년), 율곡사 괘불도(1684년), 마곡사 괘불도(1687년), 금당사 괘불도(1692년), 적천사 괘불도(1695년), 수도사 괘불도(1704년), 보경사 괘불도(1708년), 청량사 괘불도(1725년), 통도사 괘불도(1767년), 쌍계사 괘불도(1799년)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화기 등에 의해 존상의 명칭이 밝혀진 것은 많지 않아서 무량사 괘불도와 장곡사 괘불도는 미륵존상, 마곡사 괘불도와 청량사 괘불도, 통도사 괘불도는 석가모니불, 수도사 괘불도는 노사나불 등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지만 법주사 괘불도의 경우 화기에 그냥 괘불탱이라고만 적혀있어 본존의 명칭을 확인하기 어렵다. 법주사 괘불도의 본존을 노사나불이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두훈이 이 괘불도를 그리고 바로 다음 해에 조성한 통도사 괘불도(1767년)의 본존이 꽃을 들고 있는 석가모니불이라는 점에서 법주사 괘불도의 본존은 석가모니일 가능성이 크다.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석가가 연꽃을 대중에게 들어보였을 때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이 그 의미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선종의 염화시중(拈花示衆), 즉 선종에서 교법을 전하는 염화시중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의 법화신앙(法華信仰)과 선종(禪宗)이 결합된 복합적 불교신앙을 보여준다.
이 괘불도는 18세기 후반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두훈이 13명의 화승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13미터가 넘는 대형의 화면에 꽃을 든 본존상을 단독으로 그렸다. 상체가 크고 건장한 반면에 하체는 빈약하게 그려 전체적인 비례가 잘 맞지는 않지만 다양한 문양과 장식, 밝고 선명한 원색과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7,18세기에 유행하던 보관형 석가모니괘불도로서 조선 후기 괘불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