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군직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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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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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년(효종 7) 별군직(別軍職)의 집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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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56년(효종 7) 별군직(別軍職)의 집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내용

별군직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당시 그를 배종(陪從)했던 8장사군관(八壯士軍官)의 노고를 생각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설치한 친병(親兵)이다. 팔장사군관은 박배원(朴培元)·신진익(申晉翼)·오효성(吳孝誠)·조양(趙壤)·장애성(張愛聲)·김지웅(金志雄)·박기성(朴起星)·장사민(張士敏) 등이다.

효종은 즉위해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한 인재 발탁 및 북벌(北伐)을 위한 군비 확충에 힘썼다. 그러나 김자점(金自點) 일파 및 정명수(鄭命壽) 등 청국 관리의 눈치를 일일이 살펴야 할 정도로 친청파(親淸派)의 위협에 항상 불안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치된 별군직은 효종 7년에 가서야 비로소 그 직청(職廳)을 설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설치된 별군직청의 업무 수행은 통솔자인 행수별군직(行首別軍職) 또는 장무관(掌務官)인 지구관(知瞉官)을 중심으로 운용되었다.

그 구성원은 무정액(無定額)의 산직(散職)이었지만 10∼20인 정도를 유지하면서 점차 실직(實職)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별군직 직품(職品) 구성은, 당상(堂上)은 첨지(僉知) 이상, 참상(參上)은 주부(主簿) 이상 그리고 참하(參下)는 부장(部將)의 예에 붙였다.

부장으로서 사만(仕滿) 20삭(朔)이거나 등과를 하면 승륙(陞六)해 주부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실직으로 나아가 아장(亞將)이나 곤수(閫帥 : 병사 또는 수사)를 지내게 되면 별군직에서 면직되었다.

별군직의 기능으로는 입직(入直)·시위(侍衛)·적간(摘奸) 등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왕의 최고 근밀(近密)한 시위직으로서 국왕의 신변 보호를 담당하였다. 별군직청의 입직은 『대전회통』에서 밝히듯, 2인이 3일간씩 입직하도록 되어 있으나 때에 따라서 조금씩 유동적이었다.

이러한 별군직청의 청규도 순조 이후로는 점차 해이해졌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의 군제 개혁과 함께 그 성격도 변모했고, 이어 좌시어청(左侍御廳)으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감재청고사(感載廳故事)』
『별군직청등록(別軍職廳謄錄)』
「조선후기(朝鮮後期) 별군직(別軍職)의 조직(組織)과 그 2」(장필기, 『사학연구(史學硏究)』40, 1989)
집필자
장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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