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위치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다. 신라 말의 고승 보양(寶壤)은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고 귀국한 뒤 이 절에 머물렀다. 그 때 고려의 태조가 청도 견성(犬城)에 있는 산적을 물리치려고 하였으나 쉽게 항복하지 않으므로 보양을 찾아가서 적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방책을 물었다.
이에 보양은 “대개 개(犬)라는 것은 밤에 지키되 낮에는 지키지 않고, 앞은 지키되 뒤를 잊어버리는 것이니 마땅히 낮에 성의 북쪽을 쳐들어가야 할 것”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적이 패하여 항복하여 왔다.
이에 태조는 보양의 신통한 지혜를 높이 사서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조세 50석을 이 절에 주어 향화(香華)를 받들게 하였다. 이 절에는 보양과 태조의 진용(眞容)을 봉안하였으므로 그 뒤부터 절 이름을 봉성사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