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릉산록 좌우에 석실분과 토광묘 10여 기가 소재하고 있는데 분구(墳丘)는 대부분 도굴, 파괴로 인해 없어졌다. 특히, 석실분은 도굴이 용이해서 괴석(塊石) 한 두 개만 남아 있을 뿐 구조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토광묘는 여러 기가 지하에 남아 있어서 1971년에 조사하였다.
토광묘들은 소사리 뒷산에 분포되어 있다. 동·서·남 삼면은 초촌평야에 면해 있다. 이들은 구릉 서남사면에 4기가 서로 2.5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분포되어 있다.
A호분은 분구의 흔적이 전혀 없고, 토광이 얕게 묻혀 있었다. 크기는 동벽 너비 1.2m, 서벽 너비 1m, 동서 장벽 길이 3.2m이며, 깊이는 동쪽이 40㎝, 서쪽이 30㎝이다. 목관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천장시설은 따로 하지 않고 주검 위에 고운 흙을 덮어 나간 듯하다. 부장품으로는 토기 2개가 발견되었다.
B호분은 역시 분구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으며 토광은 지표 밑 80㎝ 정도에서 확인되었다. 크기는 동벽 너비 1.85m, 서벽 너비 1.7m, 동서 장벽 길이 3m이며, 깊이는 동쪽이 60㎝, 서쪽이 53㎝이다. 부장품으로는 토기 2개가 발견되었다.
C호분도 분구는 전혀 없었다. 토광의 크기는 동벽 너비 1.1m, 서벽 너비 1m, 동서 장벽 길이는 2.1m이며, 깊이는 동쪽이 30㎝, 서쪽이 10㎝이다. 부장품으로는 토기 2개와 쇠못 1개가 발견되었다.
D호분의 토광의 크기는 북벽과 남벽의 너비가 동일하게 1m이고, 남북 장벽 길이는 3.1m이며, 깊이는 동쪽이 50㎝, 서쪽 35㎝로 서벽쪽이 더 많이 삭토(削土)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토기 2개, 구슬 여러 개가 발견되었다.
4기의 토광묘는 구릉의 정상부에 분포되어 있어 비록 분구는 모두 유실, 파괴됐으나, 특징은 찾아볼 수 있다. 위치가 구릉의 정상부라는 점, 토광이 비교적 크고 너비가 넓다는 점, 토광의 굴착방법이 괭이같이 날의 너비가 좁은 도구를 사용한 점 등이다.
또한 부장품으로 출토된 토기들은 단지〔小形壺〕인데, 높이가 20㎝ 내외, 구경 13㎝ 내외이고 둥근 바닥〔圓底〕으로서 표면에 자리무늬가 새겨진 전형적인 백제토기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부여지방에서 발견되는 토기이기도 하다.
토광묘의 조성연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토기의 기형과 무늬가 약간의 고식(古式)을 띠고 있어 대략 5, 6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