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 19일에 부여읍에서 정동리(井洞里)로 가는 도로에 면한 밭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점은 청산성(靑山城)의 동북쪽 끝부분이자 부여나성과 청산성이 연결되는 곳이다.
지표에 가까운 위치에 석비레층을 지름 45∼50㎝, 깊이 40∼50㎝로 원혈(圓穴)을 파고 그 안에 골호(骨壺) 1점을 안치하였다. 옆막음돌〔側石〕이나 덮개돌〔蓋石〕은 없었다. 발견된 유물은 뚜껑이 있는 토기호(土器壺) 1점과 동전(銅錢) 2점뿐이다. 묘의 주변에서는 초석(礎石)과 기와조각·토기조각이 다수 발견되었다.
장골용기(藏骨容器)로 사용된 토기는 부여지방에서 자주 발견되는 전형적인 골호이다. 구형신(球形身)이고 광구(廣口)·단경(短頸)·직립(直立)의 아가리〔口緣部〕를 가졌으며 평저(平底)이다. 어깨부분은 편평하고 갑자기 옆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축소되어가는 형이다.
아주 고운 태토(胎土)를 사용한 회색의 경질토기(硬質土器)로서 어깨부분·복부(腹部) 등에 2줄씩의 음각선이 3부분에 둘려진 외에는 문양이 없다.
뚜껑은 호(壺)에 맞춰 만들어져 질과 색이 동일하다. 편평한 윗부분 중앙에는 가야식에서 많이 보이는 단추형의 낮은 유(鈕)가 붙어 있다. 전체 높이 20.2㎝, 호의 높이 17㎝, 구경(口徑) 12㎝, 저경(底徑) 12.2㎝, 최대 복경(腹徑) 23.5㎝, 뚜껑의 높이 4.5㎝이다.
동전은 2점으로 모두 개원통보(開元通寶)로, 1개는 파손된 채 호 안에서, 또 1개는 호 바깥에서 수습되었다. 개원통보는 당나라 고종 무덕(武德) 4년(621)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 전기에 주로 통용되었던 화폐이다.
초석은 유적에서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민가에서 10여 개가 발견되었다. 대부분 지름이 30∼40㎝, 높이 30㎝ 정도의 간단한 것들이다. 그 중 1개는 포탄형(砲彈形)의 구멍이 패여 있다. 기와조각들은 회색의 반경질(半硬質)의 백제와질(百濟瓦質)이며, 어떤 것은 자리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유적에서 약 30m 떨어진 여남산 기슭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석불좌상이 있었다고 한다. 화장용기(火葬容器)와 석불(石佛), 무수히 발견되는 기와조각으로 볼 때, 백제의 사찰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쌍북리 화장묘는 대략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