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봉상시

  • 역사
  • 제도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시대 제도의 정비과정이후 봉상시(奉常寺)의 전신(前身)의 관서.
이칭
  • 이칭봉상시(奉常寺)
제도/관청
  • 설치 시기조선 전기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최종수정 2026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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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제도의 정비과정이후 봉상시(奉常寺)의 전신(前身)의 관서.

내용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사농시(司農寺) 혹은 전농시(典農寺)를 세조 때 봉상시에 병합시킨 뒤에 부르던 칭호이다. 이는 고려 충선왕 때 전농사(典農司)란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어 적전(籍田)의 관리와 국가 제사에 소요되는 곡식 및 희생(犧牲)을 담당하였다.

조선에서도 1392년 개국과 함께 사농시를 설치하고 판사(判事) 2원, 소경(少卿) 2원, 승(丞) 1원, 겸승 1원, 주부(主簿) 1원, 직장 2원을 두었다가, 1401년(태종 1) 전농시로 개칭하고 영(令) · 부령(副令) · 정(正) · 부정(副正)을 더 두었다. 1414년에 영과 정을 윤(尹)으로, 부령 · 부정을 소윤으로 고쳤다가 세조 때 봉상시에 병합시키고 소속관원도 모두 해산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동적전(東籍田)과 개성의 서적전(西籍田)을 관리하기 위하여 분봉상시란 부서를 두고 봉상시의 낭관(郎官) 2인을 배정하여 각기 적전을 관리, 운영하게 하였다. 분봉상시의 연간예산은 쌀 132석이었고 선혜청에서 조달되었다.

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태조실록(太祖實錄)』

  • - 『태종실록(太宗實錄)』

  • - 『세조실록(世祖實錄)』

  •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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