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내각제는 의회의 다수 의석 정당이 행정부 구성권을 가지며 의회에 책임을 지는 정치제도이다. 다수당이 수상과 각료를 구성하고 책임 정치를 수행한다. 과반 이상의 다수당이 없을 경우 정당들 간의 제휴와 연대를 통해 연립정권을 구성한다. 상호견제와 균형을 위해 의회는 불신임권을, 내각은 의회해산권을 가진다. 의회가 불신임 결정을 하면, 즉시 총사퇴하거나 의회 해산 후 국민의 신임을 묻는 총선거를 통해 내각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제2공화국 때 의원내각제를 정식으로 도입했는데 정당정치의 미성숙으로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근대 입헌 민주주의 정치제도 중 대통령 중심제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로써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의회의 다수 의석 정당이 수상을 비롯한 내각 구성권을 가지고 행정부를 주도한다. 내각은 의회에 책임을 지기에 의회의 불신임 결정이 내려지면 즉시 총사퇴하거나 의회 해산 후 국민의 신임을 묻는 총선거를 통해 내각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즉 이 제도는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회의 주도성과 우위를 인정하되 내각에는 방어권을 부여하여 상호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의회는 내각 불신임권을 가지며 내각은 의회해산권을 보유한다. 또한 과반수를 넘는 다수당이 없을 경우에는 여러 정당들 간의 제휴와 연대를 통한 연립정권의 수립도 가능한 제도이다.
대통령 중심제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간의 3권분립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추구한다면 의원내각제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긴밀한 연계를 강조하여 3권분립 원칙이 유연하게 적용된다.
의원내각제는 17세기 말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 최초로 성립했다. 국왕의 자문을 위하여 설립된 개별장관책임제도(個別長官責任制度)가 발전하여, 의회에 대한 국정의 책임을 내각에 두는 의원내각제의 원초적 형태를 성립시켰다. 이후 각국의 역사적 조건이나 정치상황에 따라 의원내각제는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어 존재해왔다. 즉 의회의 우위성이 강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 제4공화국이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우에는 행정권 우위에 입각한 의원내각제를 성립시키도 했다.
한국에서 의원내각제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1960년 제2공화국에서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의원내각제의 연원은 1919년 임시정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임시정부는 대통령 중심제와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가 번갈아가며 채택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40년 이후 주석제를 채택했지만 임시의정원은 주석 및 국무위원에 대한 선출권은 물론 탄핵권과 불신임 결의권까지 지님으로써 의회 우위의 의원내각제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다.
해방 후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은 애초 의원내각제로 고안되었지만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대통령 중심제로 변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헌법은 의원내각제 요소를 상당수 안고 있었다. 먼저 대통령을 직선이 아닌 의회 투표로 선출하였다는 점과 함께 국무총리제가 그것이었다. 대통령의 의회 선출은 1952년 발췌개헌을 통해 직선제로 바뀌었지만 국무총리 제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무총리는 사실상 의원내각제의 수상에 해당하는 지위로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불필요한 존재였지만 제헌헌법 제정 당시 국회와 이승만의 타협책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또한 국무총리 임명의 국회 승인, 국정문서에 대한 대통령과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의 부서제(副署制: 함께 서명하는 제도),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 제도 등이 의원내각제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를 명문화한 1952년 발췌개헌에서도 의회를 양원으로 구성하고 민의원(民議院)에 국무원 불신임권을 부여함으로써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추가되었다.
본격적인 의원내각제는 1960년 4 · 19 혁명으로 등장한 제2공화국에서 나타났다. 4 · 19 혁명 이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는 의원내각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을 실시(1960.6.15.)하였으며, 개정된 헌법에 따라 성립된 제2공화국은 명실상부한 의원내각제 정부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입법부는 민의원과 참의원(參議院)의 양원으로 구성하고 양원 합동회의에서 상징적 국가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며, 민의원은 실질적 행정수반으로서의 국무총리를 선출하였다. 대통령의 역할은 외국에 대해서 국가를 대표하는 등 상징적 지위였고 실질적인 행정권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국무원, 즉 내각에서 보유하게 되었다.
국무원은 민의원에 대하여 책임을 졌으며, 정부에 대한 민의원의 불신임 의결이 있을 경우에 한하여 민의원을 해산할 수 있었다. 반면, 민의원은 언제든지 정부에 대하여 불신임 의결을 할 수 있었으며, 법정기일 내의 예산안 불성립 및 조약의 비준 거부는 정부에 대한 불신임 결의로 간주되었다.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는 행정권 중심의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4 · 19 혁명의 결실이었기 때문에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권을 강화시켰다. 즉,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민의원의 동의를 필요로 하였는데, 2차에 걸친 대통령의 지명이 모두 민의원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민의원 자체에서 재적 과반수의 정족수로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민의원이 해산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국무원 구성원의 과반수는 국회의원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제2공화국의 정치제도는 명실상부한 의원내각제이기는 했지만 그 운영과 실천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점이 노정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각을 책임진 민주당 정권 내부의 갈등과 균열이었다. 민주당은 윤보선 대통령 중심의 구파와 장면 총리 중심의 신파로 갈라져 극심한 내홍을 겪었고 장면 내각은 9개월 만에 3차나 개각을 단행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여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한계를 보였다.
제2공화국의 의원 내각제가 실패한 이유중의 하나는 정당정치의 취약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내각 책임제는 무엇보다 대중적 토대가 굳건한 정당정치를 조건으로 한다고 하겠는데, 당시의 정당들은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이라기보다는 몇몇 보스 중심의 계파정치,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 등의 행태를 보여주어 내각책임제에 걸맞는 정당정치를 보여줄 수 없었다. 결국 장면 내각은 5 · 16 군사정변으로 붕괴되었고 의원내각제 정치제도 역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제3공화국부터는 다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국회의원들의 정당활동을 규제하고 또 국회의 권한을 축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남아 있게 되었는데 국무총리제 유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비록 대통령이 국회의 승인 업이 국무총리를 임명할 수 있었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는 등 대통령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형태이기는 했지만 국회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었던 것은 의원 내각제의 영향이었다. 또한 애초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이 금지되었다가 1969년 10월의 삼선개헌으로 겸직이 다시 허용된 것도 의원내각제적 전통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 성립과 함께 의원 내각제 전통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등 무제한적인 권력을 부여하면서도 국회는 국정감사권을 잃었고, 정기 및 임시회기의 일수가 제한되었으며, 또 의원들의 국무위원 겸직이 또 다시 금지되었다. 비록 국회가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동의권과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의결권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이 부여되고 국회의원 3분의 1이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됨으로써 국회는 사실상 대통령과 행정부의 들러리에 불과하게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1981년 성립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와 유사한 정치구조를 갖고 있었다. 긴급조치권이 폐지되고 국회 해산권 행사가 제한되기는 했지만, 간선제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이 집중되었다. 다만 국회는 국무총리 임명 동의권,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의결권, 특정사안에 대한 국정조사권 등을 보장한 것이 그나마 내각 책임제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권력교체기를 전후해 내각 책임제와 유사한 이원집정부제 같은 정치제도가 정치권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즉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이원화된 권력구조를 상정한 이원집정부제는 내각 책임제와 유사한 제도로써 권력분점을 위한 수단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1987년 6월항쟁과 뒤이은 개헌을 통해 성립한 제6공화국에서는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특징지웠던 강력한 대통령 권한이 축소되고 의원 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정치구조가 복원되었다. 특히 6공화국 하인 1990년의 3당합당은 의원 내각제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즉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합당을 하면서 세 세력 간의 원활한 권력분점을 위해 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합의했다. 이원집정부제와 유사한 권력분점안이었던 내각제 개헌 밀약은 김영삼의 약속 파기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한국 정치에서 내각 책임제가 정략의 대상으로 이용되었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