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사찬(沙飡)에 이르렀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이 격화되어 가던 672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은 병사 1만명을, 이근행(李謹行)은 병사 3만명을 각기 거느리고 일시에 평양(平壤)에 이르러 여덟 군데에 진영을 짓고 머무르다가,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그대로 군사를 몰아 백수성(白水城) 가까이에 진영을 쳤다.
이때 신라군은 고구려군과 더불어 당나라군을 맞아 싸워 수천 명을 죽였다. 계속하여 퇴각하는 당나라군을 공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산세는 대아찬(大阿飡)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 아찬(阿飡)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一吉飡)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과 더불어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