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묵곡리 유적 ( )

목차
관련 정보
산청 묵곡리 유적 전경
산청 묵곡리 유적 전경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 · 의례공간 · 무덤군 관련 복합유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 · 의례공간 · 무덤군 관련 복합유적.
개설

1996년 3월∼8월 사이에 경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은 지리산에서 발원해 남강(南江)으로 유입되는 경호강변(鏡湖江邊) 충적대지의 하안단구면(河岸段丘面)에 위치해 있다.

유적의 주변은 1970년대에 경지 정리되어 지금은 모두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구는 대개 지표 하 2∼3m 깊이에서 확인된다. 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에 따라 조사범위는 폭 30m로 제한되었으며, 편의상 Ⅰ지구(청동기시대 유적)와 Ⅱ지구(삼국시대 유적)로 구분하였다.

내용

Ⅰ지구는 의례공간(1지구)과 생활공간(2지구)로 구분된다.

1지구는 S자형으로 완만하게 굴곡을 이루면서 흘렀던 6∼10m 넓이의 구하도(舊河道)가 있다. 그 주위에 폭 2m, 깊이 30cm 내외의 구(溝)와 부정형의 구덩이 등이 형성되어 있다. 구(溝)는 거의 반원형을 이루며, 그 외곽에 다시 좁은 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구는 인위적으로 굴착된 것으로 단면상 U자형 또는 V자형을 이룬다. 구의 내부에는 수천점의 유물이 가득 차있으며, 구하도의 내부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구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서반부의 청동기시대 유물과 동쪽의 삼국시대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물은 대부분 파손되어 정연하게 채워져 있으며, 구의 벽에 조그마한 구멍을 파고 거기에 옥(玉)이나 토기편, 석기편 등을 끼워넣은 경우도 있었다.

구의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토제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어망추(漁網錘)·방추차(紡錘車)·소형 토기·토주(土珠)·원반형토제품(圓板形土製品)·부리형토제품 등이 있다. 석제로는 석검·석촉 등의 무구류(武具類)와 석부(石斧)·석착(石鑿)·석도(石刀)·고석(敲石)·갈돌과 갈판·부리형석기 등의 농공구류(農工具類), 저석(砥石)과 옥마저석(玉磨砥石)·찰절구(擦切具)·착공구(穿孔具) 등의 제작용구, 이형석기(異形石器), 천석(川石) 등 다양하다.

그 밖에 천하석제(川河石製)의 환옥(還玉)과 곡옥(曲玉), 옥반제품(玉半製品)과 원석(原石), 각편(剝片) 등 많은 양의 옥이 출토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소형인 석촉 등 일부를 제외한 모든 유물이 파손된 상태이다. 단도마연토기의 양이 매우 많은 점은 이 구의 성격과 관련해 주목되는 점이다.

1지구는 구의 위치나 상태, 내부에서 출토유물의 구성이나 이형 토기·소형 토기의 존재 등으로 보아, 의례와 관련된 제장(祭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례시 이용된 유물이 구의 내부에 투기(投棄)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행위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2지구에서는 수혈주거지 5기와 고상가옥(高床家屋) 9동, 야외노지(野外爐址) 1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평면 말각(장)방형에 타원형 작업공을 갖췄다. 내부에서 석기박편과 옥편(玉片)·찰절구·옥마지석·천공구 등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옥제작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고상가옥은 주로 수혈주거지의 안쪽 높은 곳에 배치되어 있다. 평면 2×2칸, 3×3칸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거관(居館) 또는 창고(倉庫)로 이용된 듯하다. 즉 1지구에서 의례를 직접 행사한 사람들의 실제생활 공간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Ⅰ지구는 의례와 생활의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 곳에서의 의례는 물과 관련이 있으면서 옥제작, 농경 등 복합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창고로 판단되는 청동기시대의 고상가옥이 여러 동(棟) 조사된 점은 주목된다. 이것은 옥제작 기술을 가진 특수장인집단(特殊匠人集團)의 경제적인 부를 증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장인집단은 고대의 특수장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제적(司祭的)인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Ⅱ지구는 삼국시대 분묘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유적은 강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나지막한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되는 곳으로, 40m×50m의 범위에서 모두 86기의 분묘가 조사되었다. 토광묘(土壙墓)·석곽묘(石槨墓)·석실묘(石室墓)가 공존하고 있으며, 5세기 중후반을 중심으로 한 그 전후의 분묘들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이들 분묘에서는 소가야토기(小加耶土器) 성립 이전의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를 비롯해 소가야토기·고령계토기(高靈系土器)·백제계토기(百濟系土器) 등이 혼재하고 있다. 따라서 접점지역에서의 문화상 파악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소가야토기(小加耶土器)의 성립(成立)과 전개(展開)」(윤정희, 경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무문토기시대(無文土器時代)의 생활의례(生活儀禮)」(이상길, 『환호취락(環濠聚落)과 농경사회(農耕社會)의 형성(形成)』, 영남고고학회(嶺南考古學會)·구주고고학회(九州考古學會) , 제3회합동고고학대회발표요지(第3回合同考古學大會發表要旨), 1988)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