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은 동남향으로 경사져 내려오는 구릉의 사면으로, 해발 15∼20m의 높이이다. 이곳에는 본래 5기의 상석(上石)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1992년에 이 일대의 70만평 정도가 칠성사업시설지구로 선정됨에 따라 경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유구의 분포범위는 동서 90m, 남북 230m였다. 조사 결과, 지석묘 3기, 석관(石棺) 또는 석곽묘(石槨墓) 12기, 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 5기 등 모두 20기의 청동기시대 분묘가 확인되었다.
제1호 지석묘는 8m×6m의 묘광(墓壙)을 3단(段)으로 좁혀가며 파서 4.5m 아래에 석실(石室)을 축조하였다. 석실에는 5매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30∼50㎝ 크기의 돌 800여 개로 적석(積石)하였다. 적석 위에 다시 12매(하 8, 상 4)의 개석을 2중으로 엇갈리게 얹은 뒤 묘광의 어깨부분까지 흙을 채웠다. 그리고 붉은 황토를 50㎝ 정도 올려서 봉분(封墳)과 같이 둥글게 만든 후 지석(支石)을 놓고 상석을 얹었다. 매장주체부인 석실의 크기는 280㎝×80㎝이고 깊이는 120㎝이다.
제1호 지석묘의 주위에는 ‘ㄱ’자 모양으로 외곽을 돌려 묘역(墓域)을 구획한 석축시설이 확인되었다. 이 석축시설은 생토를 폭 3m, 깊이 50㎝ 정도로 판 후 지석묘가 있는 쪽에만 석재를 나란하게 쌓았다. 바닥에도 폭 1.5m 정도로 판석을 깔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의 규모는 남북 56m, 동서 17.5m이다. 즉 이 범위 전체가 제1호 지석묘의 묘역인 셈이다.
제2호와 제5호 지석묘는 제1호 지석묘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외형이 봉분과 같이 불룩하게 성토되어 있는 점이나 묘광이 단이 진 점, 개석을 여러 겹으로 덮은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중 제5호 지석묘의 매장주체부는 125㎝×50㎝로 일반적인 크기에 비해 매우 작은 점이 주목된다.
석곽묘는 지석묘 하부의 매장시설과 마찬가지로 막돌로 축조하였다. 석개토광묘는 묘광을 파서 아무런 시설없이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돌뚜껑을 덮은 단순한 구조이다. 이들 분묘 내에서는 길이가 20㎝ 이상되는 화살촉 20여 점을 비롯해 170여 점의 대롱옥〔管玉〕, 석검(石劍),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재가공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각종의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덕천리지석묘와 유사한 지석묘가 인근 상남 상업지역에서 1997년에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상남지석묘는 내부에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석관을 만들고, 그 위에 많은 할석과 대형 개석을 덮은 후, 다시 굄돌과 덮개돌을 올린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매장 주체부인 석관이 깊고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대형의 상석을 이용하여 분묘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이 지역 최고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상석의 크기는 270㎝×185㎝×190㎝정도이다. 상남지석묘와 덕천리지석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남방식지석묘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에서 조사된 제1호 지석묘는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분묘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더구나 그 주위에서 확인된 대규모의 묘역시설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것이다. 한편 분묘의 건너편 북서쪽 구릉에서는 청동기시대 환호(環濠)가 확인되었다. 구릉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조성된 이 환호는 현재 150m 가량이 조사되었는데, 규모는 폭 3m, 깊이 1∼1.5m이다. 이 지역은 분묘와 관련있는 생활공간으로 생각되나 이미 파괴되어 주거지 등 구체적인 증거는 찾지 못하였다.
덕천리의 방형(方形)의 묘역이 딸린 분묘는 중국 동북지방의 강상묘(崗上墓) · 누상묘(樓上墓)나 일본 산음(山陰)지방 야요이〔彌生〕시대의 사우돌출묘(四隅突出墓)와 대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주변 지역과의 연관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청동기시대 분묘에 이미 봉분의 개념이 도입된 점이나 단이 진 대형 묘광과 복잡한 시설을 갖춘 매장시설, 동검이나 대롱옥을 비롯한 각종 유물은 남부지방 청동기시대 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이 유적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것으로, 조성시기는 서기전 4∼3세기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