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총명한 지혜가 있어 능히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크게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성덕왕 12) 육조가 입적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하였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금마국(金馬國) 미륵사의 승려 규창(圭昌)이 당나라에서 귀환하면서 가지고 온 『법보단경(法寶壇經)』을 보고 “스승이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5, 6년이 지나서 1인이 나의 머리를 취하러 올 것이다.”라는 대목을 읽다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田)을 지으리라.”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었던 법정(法淨) 비구니에게 2만금(金)을 빌려서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률사(栢栗寺)의 승려 대비선백(大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의 정상(頂相)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법정 비구니가 주하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뒤에 한 승려가 꿈에 나타나서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의 눈 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대비와 함께 지리산을 더듬다가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암자를 세웠으며 선정(禪定)을 닦기에 힘썼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목욕하고 『법보단경』을 염송하다가 앉아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유체를 받들어 운암사(雲巖寺)에 유장(遺葬)하였다. 제자로는 인혜(仁慧)·의정(義淨) 등이 있다. 신라 말 진감국사(眞鑑國師)는 지리산 화개곡에 있는 삼법화상의 유지를 찾아가서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쌍계사(雙磎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