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의 상권은 상품이 유통되는 일정한 지역을 의미하며, 상세권(商勢圈)이라고도 한다. 상권은 다양한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중심지의 성격에 따라 상권의 종류를 나누면, 도회지 상설시장의 상권과 농어촌지역 정기시장의 상권으로 분류된다. 유통되는 재화와 용역의 종류를 기준으로 상권을 분류하면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지기도 한다. 또한, 상권을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눌 수 있다.
대상권은 커다란 소비지를 끼고 있고, 생산지로부터 대량 반입된 상품이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 외에 다른 지역으로도 많이 반출되는 상권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중상권은 도매와 소매가 함께 이루어지고, 한편으로는 인근지역 물산의 집산지 구실을 하는 지방의 중소도시에 형성된다.
그리고 소상권은 상설시장의 발달도 미약하고, 소매를 위주로 하는 소도시나 정기시장에 형성된다. 이런 몇 개의 소상권은 중상권에, 다시 몇 개의 중상권은 대상권에 포괄된다.
상권의 형성은 그 지역 상인들이 일종의 독점권을 확립하였음을 의미한다. 상권은 일정한 수요를 기반으로 형성되므로 그 상권에 속하지 않는 상인의 상거래는 여러 가지 상업관행과 특권에 의하여 제한, 저지된다.
서울의 시전이 자신의 독점 상권을 침범하는 비시전상인의 상업활동을 막기 위해 행사했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공급을 통제하는 독점의 피해는 소비자에게 파급된다.
한편, 동일 상권 내의 상인간에는 자본대차·신용거래·가격조절·정보교환 등과 같은 상업 관행이 정착되어 상권의 유지, 강화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상권이 공고한 곳일수록 상인 상호간의 결속력이 강하며, 여러 가지 상업 관행과 제도가 발전하게 된다.
상권이 형성되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풍부한 상품의 존재가 전제된다. 생산물이 자급자족을 벗어나 상품화 수준에 이를 정도로 사회적 생산력이 높아져야 한다.
생산력이 낮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직접 생산자들끼리의 물물교환은 상품의 매매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 토대 위에 형성되는 교역권을 상권이라고는 할 수 없다.
15세기 후반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처음 개설된 시장은 흉년에 고통받던 주민들이 서로 만나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데 불과하였다. 여기에는 상품 교환의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혹은 자급자족경제 내지는 상품화폐경제가 미약하게 발달한 사회에 다량의 상품이 유입되어 토착경제의 상품화폐경제를 촉진시킬 때 상권이 발생하거나 기존 상권이 크게 재편된다.
개항 이후 대외무역의 발전에 따라 이미 상업 중심지로서 상권을 이루고 있던 개성·수원·공주·청주·전주·광주·대구·동래·의주·평양·함흥 등지보다, 개항장인 인천·부산·원산·군산·마산·목포·진남포·신의주·청진 등지에 다량의 수출입 상품이 집중되자, 자연히 상품화폐 경제력이 미약하던 기존의 상권은 약화되고 대신 개항장을 중심으로 더 크고 많은 상권이 형성되었다.
둘째, 소비력이 왕성해야 된다는 점이다. 특히 인구는 수요의 창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일정지역의 인구밀도는 상권의 형성·분할·확대를 좌우한다.
어떤 상권의 수요의 총합이 그 존속 수준에 미달하거나 초과할 때는 적정 수요를 유지하기 위한 상권의 확대와 분할이 이루어진다. 이 점은 뒤에서 조선 후기 서울 어물전의 상권 변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셋째, 교통·수송의 조건이다. 이 조건은 상품의 수송은 물론 구매자의 접근을 좌우한다. 상품 수송의 수단이 선박이라면 상권은 강·바다의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강경·칠성포·상주와 같은 조운의 요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혹은 새로운 육상교통이 개발되면 그 수송로상 이점을 안고 있는 지역이 신상권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개항 이후 획기적인 교통·수송 수단의 발전은 영등포·천안·조치원·대전·김천·이리·송정리·나주·사리원을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또한, 고속도로의 개통은 지방 상권의 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철도교통의 이점을 누리면서 성장한 상권을 위축시켰다. 인근지역에 상품을 공급하던 천안·조치원·김천·이리의 도소매업은 활기를 잃게 되었고, 도시의 발전 자체가 정지해 버렸다.
하나의 도시 내에서도 도로 개설에 따라 상권은 매우 달라진다. 이 조건에 지리적 요소를 덧붙일 수 있다. 산악지대와 같이 폐쇄되고 고립된 지역의 상권은 좁고, 반대로 개방된 평야지대는 상권이 상대적으로 넓게 형성된다.
이 밖에도 행정구역과 역사적 배경 등의 조건도 있다.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지만 도청·시청·군청의 소재지가 지역적 상권의 중심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상품화폐경제가 미숙했던 시대일수록 상권은 행정·군사의 요충지에 형성되었다. 개항 이전에 순수한 상업도시는 개성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건을 총괄하여 말한다면 상권은 자본의 소재와 크기에 따라 형성,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큰 자본이 있는 곳일수록 더 넓고 강한 상권을 가지고, 또 더 많은 상권을 포괄하게 된다.
기록상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시장이 등장한 때는 490년(소지왕 12)으로, 경주에 시전을 설치하여 사방의 물자를 교역하게 하였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정치·군사의 중심지에는 시전형태의 시장이 개설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는 개경에 시전이 설치되어 관청의 물자를 조달하고, 개경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또한, 지방에도 향시가 행정·교통의 요지에서 열렸다.
조선왕조 역시 서울에 800여 칸의 시전 건물을 짓고 특권 상인으로 하여금 관청의 물자 조달과 일반인의 필수품 공급을 독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시장은 기록상 15세기 후반에야 나타나 그 발달이 미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인에 대한 규제조항이 ≪경국대전≫에 실려 있고, 부유한 상인들의 활발한 활동이 기록에 빈번히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소수의 행정·교통의 요지에는 이미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 나주·전주·경주와 같은 도회는 관아에서 설치한 시사(市肆:시장 거래에 있는 가게)를 중심으로 큰 규모의 상거래가 행해졌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수도를 비롯한 소수의 지방 요충지에는 관청의 감독을 강하게 받는 어용상점이 존재했으므로, 나름대로의 상권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의 농민사회는 자급자족 단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설혹 시장이 열렸더라도 상권을 이룰 정도의 상거래는 상상하기 힘들다.
농촌의 정기시장 가운데 상권을 형성한 것이 나올 수 있던 시기는 개별적 시장이 일정한 시장권으로 흡수, 소멸, 통합되었던 18세기 후반으로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
이 시기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현저하던 때로, 하나의 시장에 비교적 고정된 수요가 항상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이런 연계 시장망이 조정,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시장망의 핵심이 된 곳은 여러 개의 군현을 상권으로 포괄하고 있던 지방 경제의 중심지로 다른 지방의 산물을 정기시장에 공급하고, 또한 그 지방의 산물을 집산하는 기능을 가졌다.
전통시대는 이러한 상권 안에서는 각종 정보가 교환되었고, 통혼권(通婚圈)이 상권과 겹치기도 하였다. 이런 곳에는 정기시장도 열리지만 점차로 도매와 소매를 겸하는 상설 점포가 열려 상설 시장화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감영 소재지가 대표지역으로 꼽힐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지방도시의 시장에 상설 점포가 생긴 때는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한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상권의 변화를 17세기 후반 서울의 어물전 경우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시전의 내어물전에 최초로 도전했던 것은 외어물전이었다. 외어물전은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던 서소문 밖에 위치하여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곧 내어물전의 상권을 침탈하는 동시에 상권 확대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행위였다.
이런 불법에 대한 내어물전의 호소를 받아들인 정부는 서소문 밖의 어물전을 없애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끝내는 그 어물전을 외어물전으로 공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뒤 두 어물전 사이에는 소송이 그치지 않았고, 정부에서 어염(魚鹽) 분배를 외어물전 1, 내어물전 3의 비율로 조정하기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남대문 밖 칠패(七牌:私商들의 시장)에 난전이 번성하였다. 이곳 상인은 누원점·동작진의 어물을 매점하고, 다시 중도아(中徒兒)를 동원하여 수각교·회현동·주자동·어청동·어의동·죽전동·이현·병문 등 서울의 중심부를 비롯하여 각 처에 어물을 공급, 판매하였다. 이곳 가운데 이현의 상인은 만만치 않아 칠패의 상권에 속할 때도 있었지만, 독립적인 때도 있었다.
내외 어물전의 상권에 대한 위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자료에는 경강상인들이 어염선을 아예 경강에 정박시키고 영업했던 것이 보이고, 또한 누원·파주·송파·광주·과천·양주·인천 등 서울과 인접한 곳에 또 하나의 상권이 형성되어 어물의 집적과 판매가 행해졌다.
여기에다가 18세기 말의 통공정책(通共政策)으로 금난전권이 한동안 폐지되어 내외 어물전은 관청에 진배(進拜)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또, 19세기 중엽에는 동대문 밖의 어물전이 내외 어물전의 상권을 침탈하였다. 이러한 상권의 확대와 분할은 어물전 외에 포목전·미전 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변화의 근본 원인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서울 주민의 구매력 증대에 있다. 기존의 특권 상인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사이에, 비시전 상인들이 더 좋은 조건으로 직접 생산자·중개상인·소비자들에게 침투하여 수요 증가로 확대된 상권을 분할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상들은 금난전권을 피하고, 지방에서 반입되는 상품을 도고(都庫:都賈)하기 위하여 서울 근교 교통의 요지에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였다.
상권은 금난전권이 폐지되거나 상품의 반입로가 변경되면 약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든다면, 송파는 수로로는 한강 상류지역인 충주·원주·정선·영월·춘천 등지와 연결되고, 육로로는 용인·광주·이천·여주·충주·원주·강릉까지 이어졌으며, 한양을 거치지 않고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의 북부지방으로도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서는 미곡·어염·면포·연초·소·땔나무 등 각종 물화가 집적, 매매되었다. 그리하여 송파시장은 거의 상설 시장화하였고, 시전과 평시서(平市署:시전에서 쓰는 자·말·저울 따위와 물건값을 검사하던 관아)가 없애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한강 상류의 것보다 더 우월한 상품과 자본이 인천을 통해 직접 한양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므로 송파시장은 쇠퇴를 면하지 못하였고, 그 뒤 겨우 소시장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밖에 서울 근교 상업지의 운명도 비슷하였다. 엄청난 자본의 유입과 생성이 기존 상권을 철처히 재편하였다. 근대 문물이 유입되면서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권은 서서히 변화되었다. 철도와 도로의 개설 등으로 육로의 교통 중심지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경제성장에 따라 인구의 도시 집중과 교통·통신의 발달, 그리고 자본의 증가, 수요의 다양화 등에 의하여 인구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거나 전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다.
서울의 경우 강남·잠실·영등포 등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고, 대형 백화점과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남대문 일대와 동대문 일대의 상권도 확장되고 있다.
세운상가·경동 한약시장·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등 전문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지방의 경우도 교통과 주거지의 환경에 따라 상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나, 일부 지역의 경우 여전히 재래시장이나 행정 중심지를 중심으로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
우리 나라 상품의 해외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해외시장도 차차 넓어져 해외에도 상권이 확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