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전투는 1951년 5월 26일에서 28일까지 국군이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전개하여 중공군에게 승리한 전투이다. 파로호는 이 전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중서부 전선인 문산~간성지역에서 진행된 반격작전의 일환이었다. 27일에서 28일까지 중공군을 격멸한 뒤 28일에 미군이 화천을 점령하고 국군이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퇴로가 막힌 중공군이 화천저수지에서 익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최소 2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조 · 중연합사령부는 전선 분할과 양익 포위공격으로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킨다는 작전개념 하에 중공군과 북한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을 주요 공격목표로 1951년 4월 22일부터 29일까지 일명 ‘4월 공세’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유엔군은 노네임선(수색∼구파발∼금곡∼청평∼용문산∼홍천북방∼현리∼양양북방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4월 공세 이후 공산군측은 계속해서 중동부전선의 돌출된 국군을 섬멸한다는 작전계획 하에 2개 병단 54만 명을 동원하여 1951년 5월 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해 인제 방면으로 주공을 투입, 국군 제3군단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 결과 국군 제3군단이 현리전투에서 와해되었지만, 속사리까지 근접한 중공군도 작전한계점에 도달해 퇴로 차단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친 공산군측의 공세를 분쇄한 유엔군은 5월 20일부터 문산∼연천∼화천저수지∼양구∼간성을 잇는 캔사스선 탈환을 위한 제3차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중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문산∼연천,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화천,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양구,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간성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유엔군의 제3차 반격작전 계획에 따라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5월 20일 화천 탈환을 목표로 좌로부터 미 제24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 미 제7사단으로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9군단에 부여된 임무는 신속한 화천 점령으로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속사리까지 진출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화천을 향해 진격하던 미 제9군단은 5월 25일 춘천 방면과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하는 중공군이 화천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항공관측 보고를 받았다. 미 제9군단장은 적이 통과할 군단의 최종 목표인 화천저수지 서쪽의 도로 교차점을 조기에 점령,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 제24사단 제21연대, 미 제7사단 제17연대,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투입했다.
5월 26일 3개 연대는 춘천∼화천간 도로와 가평∼지암리간 도로, 그리고 지암리 남쪽의 국군 전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우리 속에 중공군을 몰아 넣었다. 5월 27일부터 중공군은 대대단위로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으나 퇴로를 봉쇄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격멸되었다.
특히 5월 28일 미군의 주력이 화천읍을 점령하고 국군의 주력이 화천저수지 남쪽에서 구만리발전소∼병풍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하게 되자 화천저수지로 퇴로가 차단된 적은 저수지에 익사하거나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1951년 5월 26일∼28일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최소한 2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이 전투 이후 화천저수지가 ‘파로호(破虜湖)’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화천저수지를 ‘파로호’라 이름 붙인 것에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