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화세(和世).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서지수(徐志修)이다.
1798년(정조 22) 별군직(別軍職)으로 조정에 들어가 2년 뒤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다.
이어 정주목사(定州牧使)·황해병사(黃海兵使)·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총융사(總戎使)·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등을 역임하였다.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목사로서 출정하였다.
영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위유사(慰諭使)가 되었는데 일찍이 무신으로 위유사가 된 적이 없다고 신하들이 반대하자 승지의 직함을 받아 임명될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또 좌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포교(捕校)와 원례(院隷)간의 싸움을 두고 원례만 다스렸다는 편파성으로 탄핵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북지방의 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대의로써 민을 독려하는 것을 보고는 거병(擧兵)들조차도 일찍이 서춘보가 가산(嘉山)·정주의 수령으로 애민한 이력을 알고서 “어찌 그와 서로 포시(砲矢)를 향하겠는가.”라고 할 정도로 민심을 얻기도 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